어느 배우가 미용성형을 통해 모 걸 그룹 멤버와 비슷한 얼굴로 거듭났다는 소식.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강남에 갔다가 거리의 병원이 죄다 성형외과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 병원들의 간판에는 죄다 영어로 ‘aesthetic’ (surgery)이라고 적혀있었다. ‘미학적 외과 수술(미용성형)’? 이왕 그렇게 불리니, 이 현상을 한번 미학적 관점에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
담론의 이동
얼마 전만 해도 미용성형은 주로 ‘윤리적’ 담론의 대상이었다. 물론 논란이 된 것은 몸에 칼 대는 것의 윤리성이 아니었다. 오늘날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케케묵은 글귀를 논증으로 들이댈 사람은 없을 게다. 언젠가 이 문제에 관한 TV토론에서 마광수씨한테 기선을 제압당한 적 있다. “성형을 안 한 여자는 게으른 겁니다!” 이어서 결정타를 날린다. “진중권씨, 꽤 진보적인 줄 알았는데 되게 보수적이시네요.”
대중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연예인의 정직성, 즉 ‘가짜 얼굴을 진짜 얼굴로 내밀지 않는 양심’이었다. 한동안 대중은 연예인의 과거와 현재 사진을 비교해가며 성형 혐의자를 적발해내는 일에 몰두했다. 적발된 연예인은 물론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으나, 가끔 자수하여 광명 찾는 이도 있었다. 대중은 그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그 정직성을 높이 사 그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대중의 관용을 확인한 연예인들은 너도나도 고해성사의 대열에 끼어든다. 하지만 감동도 반복되면 지루한 법. 고해의 감동이 진부해지자, 대중의 관심은 다른 데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누구의 성형은 성공했고, 누구의 성형은 실패했고…” 이로써 미용성형은 (작품처럼) 미적 비평의 대상이 된다. 하긴, 어차피 모두 가짜(?)라면, 가짜와 진짜 얼굴을 가리느니 차라리 성형의 미적 콘셉트를 평가하는 게 낫지 않은가?
현대의 성형의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와 비슷한 목표를 추구한다. ‘이상미의 구현’.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피디아스는 비너스상을 만드는 데 다섯 여인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 각각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에는 대중매체의 스타들이 그 역할을 할 게다. 어차피 대중의 이상은 제 신체 안에 각 연예인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통합시켜 미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성형의와 고대의 조각가가 추구하는 미적 이상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고대의 조각상이 ‘아름답다’(schon)면, 현대의 생체 조각들은 ‘예쁘다’(niedlich). 고대의 조각상은 실은 그리 예쁘지 않다. 그것은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로 ‘정신성’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숭고한 정신성을 연출하려고 고대의 조각가들은 신상의 이마에서 콧날로 이어지는 선을 일직선으로 만들었다.
고대의 장인들이 추구하던 ‘정신성’은 오늘날의 맥락에서 ‘성격’ ‘지성’ ‘감성’과 같은 것을 의미할 게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성형의들이 메스로 이런 정신적 속성까지 연출할 수는 없을 게다. 외려 거꾸로 성형을 통해 인물이 원래 가진 이 정신적 속성들마저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성형을 한 얼굴이 확실히 예쁘기는 해도 종종 맹해 보이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게다.
미는 개념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은 인공의 산물이지만 마치 자연의 산물처럼 보여야 한다. 최근 성형수술 역시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인공적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형한 가슴, 눈, 얼굴은 웬만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금방 알아채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의 발달로 성형한 신체는 날로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발달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자연과 인공의 차이를 보는 대중의 눈썰미 또한 날로 예리해져갈 게다.
개념적인 문제도 있다. 성형수술이 일종의 기술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기술적으로 적용 가능한 미의 기준’이 사용될 것이다. 이 경우 ‘미’는 객관적 술어로 정의할 수 있는 일종의 ‘개념’이 될 것이다. 실제로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은, 가령 수학에서 삼각형을 정의하듯이, 미를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 상식으로 통하는 것은 “미는 개념이 아니”라는 칸트의 명제다.
칸트에 따르면, 미의 정의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미가 먼저 주어진 후에 사후적으로 추출될 수 있을 뿐이다. 성형의들이 수술에 사용하는 미의 기준은 그렇게 현존하는 미인들의 신체에서 사후적으로 추출해낸 미의 법칙일 게다. 그것을 사용하면, 물론 평범한 얼굴도 꽤 예뻐질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 경우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사후적으로’ 근접할 수 있을 뿐, 참신하게 예쁜 얼굴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미는 개념이 아니기에, 아무리 ‘미의 법칙’을 추출한다 해도 그것으로 온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미를 개념으로 착각했던 고전주의자들마저도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미에는 항상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남는다”고 말했다. 그 플러스알파를 그들은 ‘Je Ne Sais Quoi’(나도 뭔지 모르겠다)라 불렀다.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그 플러스알파를 ‘엔트로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수학책에 실린 삼각형은 어딘지 딱딱한 반면, 작품 속의 삼각형은 생기 있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삽화로서 삼각형에는 오차가 없어야 하지만, 작품으로서 삼각형에는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이 ‘오차’, 이 ‘일탈’이 외려 삼각형에 매력을 준다. 고대부터 장인들은 이 원리를 건축에 적용해왔다. 가령 그리스 신전의 기둥은 완전한 직선이 아니라, 3분의 1지점에 도들림(배흘림)이 있다. 이 일탈이 기둥을 생기 있게 만들어준다.
얼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일반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얼굴을 아름답다고 하나,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가령 자신의 얼굴 사진을 좌우 반으로 가른 뒤 그 중 한쪽(가령 왼쪽) 얼굴을 역상으로 만들어 오른쪽에 갖다 붙여보라. 얼굴은 완전히 대칭을 이룰 것이나, 매우 기괴해 보일 것이다. 얼굴은 외려 살짝 비대칭일 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비밀은 (규칙으로부터의) 이 ‘일탈’에 있다.
개성에서 평균치로
문제는 성형수술의 과정에서 종종 이 매력 포인트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살짝 튀어나온 입, 옆으로 퍼진 턱 등은 ‘일반적으로’ 미적 규칙으로부터 일탈한 것으로 여겨져 시술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칸트의 말대로 미는 개념이 아니기에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가령 큰 눈도 어떤 얼굴에서는 흉하게 보이고, 작은 눈도 어떤 얼굴에서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름다움, 특히 얼굴의 아름다움은 일반화하기 힘든 지극히 ‘개별적’ 현상이다.
하지만 얼굴을 이른바 미의 ‘일반적 규칙’에 가깝게 가져갈 때, 개별적 특성(일탈)은 간단히 제거되고 만다. 그 결과는 때로 파멸적이다. 원래의 얼굴에 존재하던 질서와 무질서의 섬세한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미용성형이 아무리 발달해도, 개개의 얼굴에 각자 다르게 존재하는 이 섬세한 균형을 과학적?기술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거리에서 개성없이 획일적인 얼굴들과 자주 마주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평균적’ 아름다움 속에서 성격의 아름다움, 인격의 오라(aura)를 찾기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얼굴이 가진 ‘개성’은 자연이 프로그래밍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미용성형은 미학적으로는 아직 17세기 고전주의 단계에 있는 듯하다. 그러지 않아도 아름다운 연예인이 선뜻 미용성형에 제 얼굴을 맡기는 것을 보면 아찔한 느낌이 든다. 톱과 망치로 뇌천공 수술을 하던 17세기의 수술실을 보는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