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샀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마야의 달력: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2012 신들의 귀환> <아포칼립스 2012: 최고의 시간과학자 마야가 예언한 문명 종말 보고서> <2012 아마겟돈인가, 제2의 에덴인가?: 고대마야와 현대과학이 밝힌 최고의 비전>.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심장이 요동을 치고 아드레날린이 좌뇌우뇌에서 아이슬란드 화산처럼 분출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오래고 격정적인 길티 플레저다. 종말론 말이다.
내가 종말론에 심취한 게 언제부터인가 생각해보니 초등학생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는 <세계의 불가사의>니 <1999년 지구 멸망>이니 하는 하드커버 전집들이 가득했다. 80년대의 폭압적인 한국사회에 지친 도서관 담당 선생이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니힐리즘을 전파하고자 그런 책들을 무려 초등학교 도서관에 비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전집을 빌려왔고, 군데군데 한자가 섞인데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암호 같은 글을 미친 듯이 해독했다. 쉬는 시간이면 꼬찔찔이 애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을 풀었다. 에드가 케이시라는 영매에 따르면 곧 일본이 침몰한대.(반응: “쪽발이 새끼들 꼬시다!”- 표준어로 번역하자면 “일본인 여러분 안됐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에 따르면 1999년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와 지구가 멸망한대.(반응: “대뽀까지 마라!”- 표준어로 번역하자면 “구라를 치면 안되는 거란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엔 휴거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놈과 보충수업을 빼먹고 부산의 다미선교회 앞으로 갔다.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덩치 제일 큰 새끼가 뜨기 시작하몬 발목을 붙들고 같이 올라가는 기다.”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수학능력평가가 취소되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몇년 전엔 스위스의 초대형 입자가속기가 힉스 입자를 찾으려다 미니 빅뱅을 일으키고 미니 블랙홀을 만들어 다가오는 마감일을 집어삼키길 간절하게 기원하던 중, 문득 생각했다. 왜 나는 종말론에 이토록 심취하는 걸까. 혹시 나는 종말이 허위로 판명 나는 순간에 밀려드는 삶의 희열을 만끽하고자 이토록 종말론을 사랑하는 걸까. 그러니까, 나는 설마 종말론-마조히스트란 말인가. 정신분석학적인 자문자답은 쓸모 없는 일일 테고, 어쨌거나 마야인들의 예언에 따르면 지구는 2012년 12월21일에 종말을 맞이한다. 그날 지인들은 나를 찾지 마시라. 편집장도 나를 찾지 마시라. 그날의 나는 마감 따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