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알고 지냈던 지인을 베를린에서 만났다. 그녀는 내게 어느 민족종교의 경전을 내민다. 안 받겠다고 한사코 사양해도, 자꾸 내밀며 “그냥 읽어보기만 하라”고 강권한다. 이미 만나자고 할 때부터 그녀의 목적은 전도에 있었던 모양이다. 2년 뒤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느니, 내년에 다시 천연두가 부활할 것이라느니, 계속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에 앞으로 다시 만나지 말자며 연을 끊어버렸다. 그 정도면 이미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들과 ‘논리적’ 대화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논리를 초월한 ‘믿음’을 통해서만 특정한(물론 더 고차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신앙주의’라 부른다. 물론 신앙주의가 곧 광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주의는 사실 종교적 심성의 문제이고, 광신은 그 심성을 이성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신은 그저 신앙주의의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이 말은 흔히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것으로 여겨지나, 원래 그가 한 말은 뉘앙스가 사뭇 달랐다. “신의 아들이 죽었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어져야 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믿기 힘든 말을 하더라도 혹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배경으로 한 발언이었다. 조심스러움을 강조하는 이 발언이 훗날 신앙주의의 모토로 줄곧 잘못 인용된 셈이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신앙이 합리적이라면, 이미 과학이 있는 세상에 따로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 거다. 때문에 이 논리는 종종 신도들을 설득하는 논리로 사용되곤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한마디로 믿음은 절실한 바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따로 거기에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는 외려 믿음이 거꾸로 증거가 된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에서 증거를 얻고, 이는 명백한 순환논법이다. 믿으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나, 그 증거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하지만 이 순환의 고리를 돌고 돌수록 믿음은 날로 강화되게 마련이다. 대개 종교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그 안에서는 그 순환의 고리 속에 처음 입장하는 데에 필요한 ‘최초의 증거’에 대한 요구는 제기되지 않는다. 고리를 몇번 돌다보면 그 증거에 대한 욕망은 저절로 충족되고 만다.
문제는 외려 신앙의 공동체 밖에서 이른바 ‘불신자’를 만날 때에 일어난다. 일상적 어법에서 믿음은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나, 신자들은 불신자를 위에서 말한 순환의 고리 속에 집어넣을 최초의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일단 믿으면 나중에 저절로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이라 말할 뿐이다. 여기서 일상적 어법과 종교적 어법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른바 ‘전도’라는 것의 본질은 불신자들을 이 증거 없는 믿음의 상태로 집어넣는 데에 있다.
거리에서 전도자를 만날 때의 불쾌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들은 이미 믿음을 통해 ‘고차원의 진리’를 본 사람들이기에, 내가 펼치는 ‘논리’ 따위에 절대로 설득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논리’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리란 하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자’, ‘자기도 한때는 그랬던 자’, 더 나아가서는 ‘그분을 모르기에 불쌍한 영혼’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똑같은 ‘믿음’이라 해도,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은 다르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있어야 믿고, 종교에서는 믿어야 증거를 본다. 여기서 이른바 ‘창조과학회’의 시도가 얼마나 가망 없는지 드러난다. 종교적 신앙에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려 할 때, 그들은 이미 ‘믿음’에 관한 과학의 패러다임에 굴복한 셈이다. 현대인의 의식이 과학적 사유에 물들어 있다 보니 그들을 설득하려면 과학적 믿음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신앙에 증거를 제시하려 하나, 그런 증거란 당연히 존재할 리 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주로 현대과학의 불완전함을 들춰내는 것. 그들은 그로써 신앙에 증거를 제시했다고 믿을지 모르나, 그것은 명백히 논리적 오류 혹은 비약이다. 현대과학의 불완전함에서 곧바로 종교적 신앙의 올바름이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굳이 과학적 불완전함을 따지자면 과학적 오류는 성서 속에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
신앙주의(fideism)가 반대하는 것이 바로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원칙. 하지만 창조과학의 발상은 바로 이 증거주의(evidentialism) 위에 서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과학은 종교가 제 성안에 들인 트로이 목마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17세기의 철학자, 가령 파스칼이야말로 오늘날의 창조과학자들보다 더 현명하다. 파스칼은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려 증거주의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증거 없이 믿는 게 항상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믿음이 증거에 앞선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이성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을 생각해보자. 수학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에는 정리가 사용된다.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공리가 사용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데에는 무엇이 사용되는가? 공리는 그 정의상 더 이상 ‘증명 없이 참인 명제’다. 그것은 증명 없이 믿어야 하며, 그래야 증명이라는 것도 가능해진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가령 법의 예를 들어보자. 명령과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에 따라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헌법의 올바름은? 그것은 논리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헌법의 진리를 세우는 것은 혁명이요, 전쟁이요, 쿠데타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작동하려면 화자들이 기본적 신념들(basic convictions)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참/거짓을 따지는 언어놀이도 가능해진다.
수학은 전 인류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그리고 언어의 기본적 신념들은 언어공동체 전체가 공유한다. 그 때문에 증명 없이 참으로 통하는 그 전제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 한 사회 내에서 일단 신자와 불신자가 존재하고, 신자들도 여러 종교로 나뉘기에 공리가 서로 공유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마치 우리가 수학의 공리를 증명 없이 믿듯이, 자신들의 교리를 증거 없이 믿을 것이다.
공리와 명제
어떤 신앙공동체 안에서 ‘공리’로 통하는 것도 밖으로 나오면 증명해야 할 ‘명제’가 된다. 가령 ‘처녀잉태’는 교회 ‘안’에서는 증명없이 참이나, ‘밖’에서는 증거를 요구 받는다. “그럼 예수의 염색체는 XX냐, XY냐?” 정상적인 종교는 ‘안’과 ‘밖’, 즉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유지한다. 반면 사이비 종교는 자신을 ‘밖’으로부터 고립시켜 ‘안’으로 자폐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른바 좌파공동체 ‘안’에서 증명없이 참으로 통하는 것이 ‘밖’에서는 증명해야 할 명제가 된다. 공리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들 공동체 내에서나 통하는 얘기를 믿으라고 강권할 때, 사실상 그들은 광신적인 전도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대중과 소통하려면 밖에서는 자신의 ‘공리’를 ‘명제’의 지위로 내려놓고, 믿음(이념)과 이성(논리) 사이의 최적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