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타 디지털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이 창조한 디지털 유인원들은 신기한 볼거리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릭 자파의 각본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그는 유인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도 결코 인간 군대의 지휘관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건 <우주전쟁>에서 스필버그와 각본가 데이비드 코엡이 지켜낸 원칙(‘정치가, 과학자, 장군을 내세우지 말 것. 전술 지도 펴놓고 모형을 움직이는 회의나 방송 기자의 보도장면이 없을 것’)과 맞물리는 데가 있다. 감독 루퍼트 와이어트와 각본가 릭 자파는 자신들의 영화가 고난을 통해 정체성을 각성한 뒤 혁명을 일으키는 원숭이 버전 <스팔타커스>라는 걸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오랜 원형적 서사를 튼튼하게 쌓아올리는 데만 집중한다. 물론 간결한 시나리오의 힘을 지켜낸 또 하나의 공신은 감독 루퍼트 와이어트다. 2008년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영국산 탈옥영화 <이스캐피스트>(The Escapist)에서 잔가지 없는 장르영화를 직조했던 와이어트는 “프랜차이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영화”가 목표였다고 말한다. “지난 <혹성탈출> 시리즈의 유산은 그저 케이크의 장식 정도로만 사용하고, 성경이나 고대 신화처럼 좀더 넓게 공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조 경험 없는 72년생 젊은 영국 감독을 기용한 이십세기 폭스의 용단은 <배트맨 비긴즈>로 크리스토퍼 놀란을 불러들인 워너의 용단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특수효과와 이야기를 따로 떼놓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영화다. 웨타 디지털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이 창조한 디지털 유인원들은 신기한 볼거리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미 <킹콩>과 <아바타>로 퍼포먼스 캡처 기술의 신기원을 보여준 바 있는 웨타의 조 레터리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아바타>의 경우,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환상의 세계는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곳이다. 이 영화는 다르다. 현대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현실적인 이야기이므로 유인원과 도시가 모두 현실적으로 보여야만 했다.” <아바타>의 나비족과 <킹콩>의 킹콩은 극단적으로 사실적일 필요는 없었다. 두 존재는 어쨌거나 영화적 환상 속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들이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처럼 실존하는 유인원이 주인공이고 실존하는 도시가 배경인 영화에서 ‘리얼리티’는 필수조건이다. 결과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황홀하다. 앤디 서키스와 웨타는 인간 배우들과 진정한 화학작용을 보여주는 역사상 첫 번째 디지털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창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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