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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힘이 전부는 아니다
김도훈 2011-08-23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고전 시리즈의 타임라인을 아예 무시한 뒤 일종의 유사과학적 소재를 삽입함으로써 지능을 가진 원숭이들의 기원을 새롭게 쌓아올린다.

<혹성탈출>의 리부트를 이끌어낸 건 순전히 CG의 발전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60, 70년대 <혹성탈출> 시리즈의 관건 역시 언제나 ‘어떻게 지능있는 원숭이를 진짜처럼 만들어낼 것인가’였다. <혹성탈출>(1968)은 전설적인 특수분장사 릭 베이커가 창조한 원숭이 분장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영화다. 베이커의 특수분장은 그 자체로 완벽했고, 그는 2001년작인 팀 버튼의 <혹성탈출>에서도 여전히 참여했다. 그러나 2001년과 2011년 사이 CG 기술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처럼 달라졌다. 피터 잭슨과 웨타가 모션 캡처로 골룸을 만들고, 로버트 저메키스가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퍼포먼스 캡처를 선보이고,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로 이 모든 ‘캡처’ 기술에 정점을 찍으면서, 디지털 캐릭터를 창조하는 기술은 마술에 가까워졌다. 만약 당신이 CG로 완벽한 원숭이를 창조할 수 있다면 <혹성탈출>을 새롭게 만들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다.

기술은 그렇다치고 이야기는 어떻게 리부트할 것인가. 제작진이 선택한 건 <배트맨 비긴즈> 이후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잡은 프리퀄이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숭이가 인간의 지능을 갖게 된 기원을 파헤치는 영화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랑코)은 제약회사에서 원숭이 생체실험으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연구 중인 과학자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 때문에 그는 인간의 손상된 뇌기능을 회복시켜주는 약품 개발에 서두르게 되고, 신약의 효능을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려는 자리에서 실험용 침팬지가 광란을 일으키다 사살당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신약 개발은 취소되고 침팬지들은 안락사당하지만 윌은 사살당한 침팬지에게서 태어난 시저(앤디 서키스)를 몰래 데려가 키우기 시작한다. 신약의 효능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아 지능이 높아진 시저는 시비에 말려든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이웃집 남자에게 상해를 입힌 뒤 유인원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인간의 지능을 지녔지만 인간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시저는 보호시설에서 학대당하면서 점점 각성을 하고, 우리를 탈출한 뒤 다른 유인원들에게 약을 투여한다. 이제 지능이 순식간에 높아진 수백 마리 원숭이들이 인간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다.

이 시놉시스를 읽은 독자라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단순한 프리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리지널 시리즈, 특히 <혹성탈출3: 제3의 인류>(1971)와 <혹성탈출4: 노예들의 반란>(1972)에서 원숭이들의 진화는 미래에서 과거의 지구로 시간여행을 한 원숭이 부부의 아들(이름 역시 똑같은 ‘시저’)로부터 시작됐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고전 시리즈의 타임라인을 아예 무시한 뒤 일종의 유사과학적 소재를 삽입함으로써 지능을 가진 원숭이들의 기원을 새롭게 쌓아올린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이 “오리지널 시리즈에 이어지는 영화가 아니라 새로운 오리지널”이라고 설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건 꽤 현명한 방법이다. 다른 훌륭한 프리퀄 형식의 리부트들을 생각해보라. <배트맨 비긴즈>는 브루스 웨인의 젊은 날을 다시 썼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평행우주’ 이론을 등장시킴으로써 앞으로 지속될 시리즈가 오리지널 <스타트렉>과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별개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선언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역시 시리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오리지널과 관련된 몇몇 요소들(이를테면 우주비행사들이 실종됐다는 뉴스 화면과 신문)이 삽입되기도 하지만, 그건 팬서비스에 가깝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젖히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프리퀄을 만드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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