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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참 아름다운 공동체이긴 한데…

<종로의 기적> 속 게이들은 어쩜 그리도 명랑할까

<종로의 기적>을 보며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명랑하다는 게 놀라웠고 동시에 의아했다. 이런 내 반응이 순진한 것이며 그에 대한 답이 뻔하다는 것도 안다. <종로의 기적>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의 선택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하며 마지막 장면에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주된 활동공간인 종로 밤거리를 당당하게 걸으면서 화면에 나타난다. 이렇게 사는 건 즐겁다, 라고 바깥세상의 사람들에게 공표라도 하는 듯이. 또는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들에게 이곳에 오면 공동체가 있고 좋은 관계가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과 권유의 제스처를 남기려는 듯이.

그게 뭐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솔직히 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의심이 많고 회의적이며 공동체보다는 개별 인간들과의 몇몇 관계에나 집중하자는 쪽인 나같은 인간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교류하면서 그렇게 활기차게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화면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수도 있으나 화면 바깥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껴안고라도 화면 안에서 영화 속 네명의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활달한 긍정과 낙천의 기운은 부러울 따름이었다. 특히 충정로에서 ‘알리오’라는 파스타집을 운영하는 영수씨가 등장하는 단락에선 눈이 번쩍 뜨였다. 십여년 전 그 근처에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곧잘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 알리오였기 때문이다. 그 식당 주인에게 영화에 보여진 사연이 있는 줄 전혀 몰랐고 다만 그 식당 음식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이 좋았다는 것에 미뤄볼 때 인간성이 좋은 주인이라고만 기억했을 뿐이다. 영화에서 영수씨는 뒤늦게 종로에서 게이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합창단에 가입해 즐겁게 산다. 나날의 일상적 관계 속에서 그는 충만하고 복된 나날을 보내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데 불행하게도 뇌수막염으로 급사한다. 늘 웃는 얼굴의 그가 갑자기 화면에서 죽음으로 사라지는 건 충격이었다. 그런 그를 보내주는 나머지 합창단원들의 의식도 감동을 주었다. 누가 이렇게 유명을 달리한 벗을 장중하고도 격의없는 의식으로 한순간도 기억에서 지워내지 않을 듯한 긴장 속에서 보내줄까 싶었다.

경이롭기까지한 그들의 긍정성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관계의 충만함이라는 면에서 보면 영수씨 못지않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 욜씨는 아마도 영화 속 등장시점에선 안정된 대기업 직장인인 듯싶은데 함께 사는 그의 애인은 HIV 바이러스 감염자다. 주변 사람들에게서조차 염려를 듣는 상황인데도 그는 자신의 사랑 선택에 당당하고 헌신적이다. 동료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는 그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첫 등장장면에서 그가 외출하기 위해 부지런을 떠는 동안 그의 애인이 아직 잠자리에서 꾸물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타 장면들에서도 애정표현에 적극적인 그와 달리 그의 애인은 좀 뚱한 성격인 듯하다. 관계를 시작할 때도 욜씨가 먼저 적극 구애했다는 것이 이들 커플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다. 그가 품고 있는 이 낙관의 토대는 특히 신기한데 이어지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유독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많고 주는 것 자체에 대해 아무런 자의식이 없는 듯이 보인다. 가공할 만큼 순수한 이 절대적 사랑의 감정을 지탱함으로써 그는 그와 애인의 관계에 대해 비관적인 주변 사람들의 시선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통한 표정을 짓는 것은 HIV 바이러스 치료약을 의료보험 항목 안에 포함시켜 달라는 시위를 할 때이다. 근엄한 관료들 행사에 사전예고 없이 들이닥쳐 단상 위에서 시위를 벌이는 무리에 속한 그는 피켓을 얼굴 앞에 들고 이를 악문 채로 슬픔과 분노를 견디고 있다.

영수씨와 욜씨 못지않게 낙관으로 단련된 또 다른 인물은 병권씨다. 그는 직업활동가이며 게이운동뿐만 아니라 소수자 차별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열심이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가 여의도 집회 현장을 누비며 전단지를 나눠줄 때 그의 고교 동창을 만나는 대목이 있다. 우연찮게 갑자기 커밍아웃하게 된 상황에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그의 활달한 모습은 인상적이다. 어느 때라도 자기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는 그의 태도는 그가 활동가로 살고 있다는 존재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앞서 말한 집회 말고도 이주민 노동자들과의 회합이나 그가 거주하고 있는 방이자 그가 속한 단체의 사무실이기도 한 공간에서 그가 보여주는 삶의 표정들은 운동과 일상 삶이 완전히 결합되어 일체의 회의적 틈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이들 세 사람과 달리 게이가 아닌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영화감독 준문씨만이 표정에 종종 그늘이 져 있다. 독립장편을 촬영하는 그의 갈등이 <종로의 기적>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제이기도 한데, 결국 그는 촬영을 중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동료 스탭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다. 열악한 독립영화 현장에서 종종 감독이 일정 부분을 짊어지고 가야 할 강제적 카리스마의 행사에 그는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리더가 아니라 동료로서 영화 창작 현장을 짊어지고 가려는 그는 아마도 게이이기 때문에 더욱 통솔력을 발휘해야 할 대목에서 근심하는 듯이 보인다.

<종로의 기적>에서 유일하게 게이 커뮤니티가 아닌 사회에서 겪는 인물의 갈등을 보여주는 이 첫 번째 에피소드는 한편의 독립된 장편 분량이 될 만한 소재이다. 감독의 전략적 선택으로 준문씨의 에피소드는 첫 번째로 배치되었으며 그가 겪는 갈등의 해소책은 나머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에서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여기 친구들이 있다,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살자는 메시지는 제목처럼 종로의 기적을 실감하는 다른 세 인물의 충만한 일상적 삶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화면에 흐른다. 이런저런 게이로서의 삶의 고충, 가족에게도 커밍아웃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절대적 보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딜레마는 친구와 애인이 늘 함께하는 공동체의 여러 일상적 삶 속에서 자연스레 출구를 찾는다. 그들은 함께 운동하고, 놀고, 슬픔을 나눈다.

조금만 더 독하게 쫓아갔으면

성정이 삐딱해서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들의 삶이 부러운 한편 그게 다인가, 라는 의심도 들었다. 게이라는 정체성만 서로 확인되면 그들은 그토록 행복하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관계의 항구적 고착을 유도하는 제도의 강제성이 없어도 그들의 연인관계는 잘 유지될 수 있는지, 그 관계의 부서지기 쉬운 부분에 대해서 각자 느끼는 스트레스는 없는지, 그런 스트레스는 전체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이런저런 활동들 속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화되는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이 실타래처럼 나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삶에 대해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여하튼 우리 편 논리일 수밖에 없다. <종로의 기적>에 대한 <씨네21>의 우호적인 기사와 평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소묘쯤으로 요약되는 우호적인 평들의 어조는 일종의 프로파간다 비평에 가깝다.

나는 그것보다는 판단을 중지하고 그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로서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을 보는 우리도 판단을 중지하고 지켜보는 것이 낫다.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은 영화에서 간혹 스쳐지나가듯이 나오는 삶의 곤란함에 대한 질문들과 답변을 대신하는 밝고 힘찬 미소들 때문이다. 말로 하는 질문들이 아니라 욜씨의 눈을 질끈 감은 시위 여단에서의 표정을 잡은 클로즈업처럼 카메라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는 들었다. 어차피 현 단계의 우리 삶에서는 아직 커뮤니티로 나오지 않은 많은 게이들에게 우리 편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목적도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므로 <종로의 기적>의 현 완성본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씨네21>에 실린 기사를 쓴 이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어떤 외경심마저 품게 된다. 다만 단맛, 쓴맛 다 품고 있는 그들의 삶에 카메라가 조금만 더 독하게 질문하는 이미지들이 몇개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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