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가~끔 치는 사고가 있는데 바로 그림 구입이다. 특성상 무이자 할부 신용구매가 불가능해서 지갑을 열기까지의 심적 저항이 상당히 크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행복해지는 순간 중 하나다. 평소 나름의 경제적 자립을 실현 중이라고 자부하는 나인지라 “열심히 일한 당신, 질러라!” 이렇게 위안해보지만 실행에 옮기기까지 치열한 고민은 계속된다. 이 돈이면 아이들 책을 몇질은 사줄 수 있을 텐데(실은 뭐 책 읽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내 형편에 너무 주제 넘은 짓은 아닐까?(난 명품 백도 안 사고 옷도 별로 안 사고 사치 안 하잖아.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이 정도도 못해!)결국 양심의 가책은 궁색한 자기합리화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난 과감하게 지갑을 열게 된다.
맨 처음 시작은 15년 전 모스크바 출장 때부터였다. 취재를 마치고 모스크바의 유명한 예술 명소인 아르바트 거리를 관광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을 만난 것이다. 짙은 녹색 바탕에 커다란 물고기를 단순하게 그린 것이었는데 보자마자 단박에 내 맘을 사로잡았고 흥정도 없이 바로 구입했다. 소중하게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벽에 걸었는데 정~말 좋았다. 모 광고처럼 어떻게 말로 설명이 안되는 그런 종류의 행복감이었다. 누구는 아이가 그린 것 같다며 뭐 이런 걸 사가지고 왔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남들이 뭐라든 나만 좋으면 되는 거지 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물고기 그림은 지금도 거실 복도 한켠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내 눈길을 받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그림 구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취재를 갔다 잠시 들른 전시회에서, 혹은 영화 포스터를 그린 걸 계기로 인터뷰를 하러 간, 평소 좋아하던 화가 작업실에서, 영화제로 출장 간 칸 해변에서 등등. 그러는 동안 나는 그림에서 더 많이 위안받고 조금 더 행복해져갔다. 간혹 그림이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인기가 많아져 사람들이 그림 구입을 많이 한다는 뉴스를 접하면 뭔 딴세상 얘기인가 싶다. 이러면서도 한편 “억울해. 난 재테크로 하는 거 아닌데. 정말 좋아서 하는 건데….”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기도 한다.
오늘도 난 거실에 걸려 있는 동양화가 권세혁의 그림을 보며 눈 덮인 겨울숲의 청명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장마 끝의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에 누리는 나만의 호사다. 정말이지 멀리 이역만리에 있는 피카소 그림보다 눈앞의 내 그림이 더 감동이고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