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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태] “온·오프라인 넘나드는 만화의 기준 만들자”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1-07-22

<영심이> 남친 ‘왕경태’의 모델 SICAF 2011 황경태 조직위원장

15주년을 맞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SICAF)이 새로운 수장을 맞았다. 만화출판사 학산문화사의 대표이기도 한 황경태 조직위원장이다. 청소년 만화지인 <아이큐 점프> <챔프> 등의 창간을 주도한 그는 스타 작가의 파워에 의존하던 기존 만화업계에 신인작가를 발굴해 국내 만화시장의 체질 개선과 토대를 만들어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오는 7월20일 개막을 앞둔 SICAF 역시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업계를 이끌어온 그의 노하우로 새로운 준비를 다지고 있다. 철두철미한 분석과 계획을 말하는 사이사이 평생 만화업에 몸담아온 이가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비밀은 <영심이>의 남자친구 ‘왕경태’의 실제 모델로서의 멋쩍은 미소다. “젊을 땐 지금보다 살도 찌고, 뿔테 안경을 써서 좀 달랐지. 황경태라고는 못하니까 성만 바꾼 거지. (웃음)”

-신임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했는데 어떤 각오인가. =원래 이사로는 쭉 활동해왔다. 지금까지는 조직위원장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선발됐다면 만화쪽 베이스로 일하는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안받고 망설였다. SICAF가 애니메이션 부문과 영화제 관련해서는 틀이 확립됐는데 만화 분야, 전시쪽으로는 초창기보다 많이 퇴색되고 변화도 별로 없었다. 한편으론 그 점이 끌리더라. 현직에 있으니 그 장점을 살려서 조직에 새로운 기운을 살려보자, 제대로 한번 해보자 싶었다.

-그 결과 이번엔 만화·전시쪽이 강화되는 건가. =애니메이션은 팀 내에서 전담하는 인력이 많다. 역시 관건은 만화쪽의 새로운 분위기를 정립하는 것이다. 전시와 관련하여 절반은 새로운 아이템으로 꾸렸다. 코스프레 대회를 비롯해 종이접기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 도자기와 만화의 만남 등의 부대행사를 늘렸다. 작가 전시라는 틀을 벗어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입체적인 전시를 해보려 했다.

-<심야식당>의 작가 아베 야로의 초청은 일본과의 꾸준한 협력이 바탕이 됐을 거라 짐작된다. =출판사와의 관계로 초청이 가능했다. 출판업을 하며 쌓아온 인연이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게스트 초청은 강화할 예정이다.

-SICAF에서 하고 있는 국제 디지털 만화 공모전의 역할도 단순한 이벤트 외의 콘텐츠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만화가 위기라고 하지만 한국은 만화에 있어 엄청난 파워를 가진 나라다. 수출로 일본에 이어 2위다. 종이잡지 역시 인터넷 보급이 안된 국가들 수요만으로도 20년은 족히 갈 수 있다. 그걸 기반으로 하되 빨리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적용시키면 된다. SICAF의 디지털 만화 공모도 그런 일환이다.

-디지털 만화 공모전은 업계의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데 아직 가시적인 효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공모하는 사람과 심사하는 사람 모두에게 좀 유연한 시각이 필요하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상업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주는 거다. 영화시나리오 공모가 실제 장편 제작으로 활용되는 것처럼 만화쪽도 그런 유연성이 필요하다.

-종이잡지와 온라인 기반의 웹툰잡지는 사실상 다른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 내 최대 관심은 어떻게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기준의 틀을 표준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잡지를 다 웹툰처럼 길게 만들든지 영화 콘티처럼 하나씩 만들어 그걸 웹에도 게재하고, 오프라인에선 다르게 조합하든지. 기간도 웹툰에 맞추어 주간 단위로 한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퍼즐만 잘 맞추면 된다. 과거 25만부가 팔리던 잡지가 지금은 1/10도 안 팔리는 게 만화출판시장의 실정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만화는 연재를 시작으로 그게 단행본으로, 캐릭터 사업으로, 영화로 가는 수순을 거치게 된다. 그러니 아직까지 종이잡지를 포기할 순 없다. 온·오프라인을 오가는 기준이 만들어진다면 온라인에서 연재를 할 수도 있다.

-손꼽히는 스타작가들을 제외하고 웹툰작가들의 고료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종이잡지가 40개국에 수출되는 것과 달리 웹툰의 제일 큰 문제가 세계시장에 통용될 수 없을 거라는 인식이다. 그래서 표준 규격이 필요한 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컷의 버전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과 함께 컬러로만 그려지는 웹툰을 컬러, 단색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때에 따라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해외수출을 하려면 컬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을 만들어 알리다보면 그중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그게 세계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뽀로로’ 캐릭터 하나로 100개국에 수출하는 나라다.

-오프라인 만화시장이 불법복제본으로 골치를 앓았던 것처럼 최근 온라인에서도 불법다운로드가 적지 않다.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게 문제다. 클릭 수가 몇 만건이 넘는 콘텐츠인데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한다. 10월부터 갤럭시탭에서 어플로 만화를 보는 서비스를 시작하려고 한다. 음악다운로드 서비스처럼 만화도 100% 돈 주고 보는 거다. 콘텐츠가 재밌다면 누가 안 보겠나. 수익은 작가와 배분하는 방식이면 얼마든지 수익성이 있다. 오프라인 시장이 급속도로 몰락하는 등 변화가 크지만 온라인 시장이 그만큼 크게 된 거다. 만화를 본다는 것으로만 따지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 지금 문제는 그런 툴이 아니라 이현세 같은 대형 스타작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그런 작가를 찾는 거다.

-스타작가로 운용되던 한국 만화시장에서 신인 발굴이라는 체질개선을 한 장본인이다. =서울문화사에서 1988년에 <아이큐 점프>를 창간했는데 그때가 기획만화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작가가 마감할 땐 말도 못 붙이는 분위기였다. 손꼽히는 스타작가가 아니면 잡지 만들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기자 역할은 ‘선생님, 원고만 주세요’였다. 까치, 독고탁, 이강토가 만화업계를 모두 석권했는데 그러다보니 잡지들이 다 비슷해지더라. 당시에 일본 만화 출판사에 가서 고민을 토로하니 ‘신인을 키우라’고 하더라. 도대체 신인을 어느 세월에 키워 작가로 쓰나. 그런데 그때 내가 사고를 쳤다. 만화에 있어 스토리가 그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때까지 별로 역할을 인정받지 못했던 스토리작가 이름을 작가들 이름 위에 썼다. 기성작가들이 다 반발해서 연재를 그만둬버렸다. 무릎을 꿇고서라도 사정을 해서 설득을 해야 했는데 어차피 이판사판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랬더니 인기있는 스토리작가들이 내게 오더라. 그때부터 그림 잘 그리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고 스토리작가와 연결해서 기획만화를 만들었다.

-엄청난 배포가 아니면 할 수 없었는데, 복안이 있었나. =편집장이 됐을 때 ‘네가 해봤자 3개월이나 하겠어’ 하고 비난하는 말들을 하더라. 눈물이 핑 돌았다.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끙끙 앓았다. 그리고 작가로서 길을 접고 완전히 편집자로 길을 굳혔다. 이것도 안되면 난 정말 안된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일만 생각했다. 작가로서 작품을 직접 해봤으니 거기서 나오는 경험치가 도움이 되더라. 자기 편견과 고집 버리고 독자가 좋아하는 시각을 가지려 했다. 말이 쉽지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아이를 보다가 아이들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기획한 게 장태산 작가를 투입한 레슬링 만화 <스카이 레슬러>였다. 신인작가로 이른바 스타작가를 제친, 기획만화를 성공시킨 첫 번째 케이스였다. 잡지가 2만부 팔리더니 5만부로 올라가고, 어느 날 보니 10만부가, 또 25만부가 팔리고 있더라.

-<아이큐 점프>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전에는 원래 작가였다. =<보물섬>에 연재했는데, 가명이다. 이름은 못 밝히겠다. (웃음) 연재작가들 중 20대 작가가 나 혼자였다. 어린 나이에 작가가 되고 주변에서도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자만심이 들더라. 근데 작가는 3년이 고비다. 3년 동안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있다. 3년 지나면 머릿속에 있던 거 다 까먹어버리니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3년 하다 잘리고 집에서 만화 그렸다. 그때 <아이큐 점프> 창간하는 데 참여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몇달 버티다가 먹고살아야겠기에 아트디렉터로 갔다. 한달에 15일은 일하고 나머지는 내 작품 하는 조건으로 간 거였다. 그런데 창간 때 격주간이던 잡지가 주간이 됐고, 작가들 나가고 편집장 나가면서 발목 잡힌 거다. 봉급도 적고, 열악한 게 만화잡지였다. 근데 만화로 밥 벌어먹고 산다는 게 매력적으로 보이더라.

-<아이큐 점프>의 성공 이후 지금은 서울문화사와 만화출판사의 양대산맥이 된 도서출판 대원으로 옮긴 건 의외다. 경쟁지인 <소념챔프>도 이때 나왔다. =25만부까지 팔리니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하더라. 이게 한계가 아닐까. 우리나라 만화시장에서 나올 수 없는 수치 같더라. 여러 곳에서 제안을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려고 거처를 옮겼다. 혼자 출판사를 만든 거나 다름없다. 제작, 작가관리 모두 다 하면서 <소년챔프>를 만들었다. <아이큐 점프>를 만들 때는 몰랐는데 혼자 그 잡지를 경쟁하려니 어마어마한 산이더라. 처음 15만부 찍고 완전 ‘박살’이 났다. 눈물이 흐르더라.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역시 해답은 신인작가를 키우는 길밖에 없더라. 주변 만류에도 스토리가 재밌으면 고등학생 작가도 기용했다. 그게 독자에게 먹혔다. <붉은매>로 재기를 다졌고 1년6개월 만에 20만부 이상을 판매했다. <비트> <열혈강호> <검정고무신> 모두 그렇게 나왔다.

-지금의 학산문화사는 서울문화사와 도서출판 대원의 후발주자임에도 업계에서 공고히 자리를 다졌다. =대원 있을 때 1년 매출이 40억원이었다. 세금만 10억원이 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왕 세금 낼 거 잡지를 원없이 만들자 했다. 독자층별로 다양한 잡지를 다섯개나 만들었더니 더이상 만들 잡지가 없더라. 회사에 새로운 법인 출판사인 학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때가 39살 때였는데 1억원 가지고 만들었다. 1995년에 만들고 얼마 안 있어 IMF가 왔다. 망하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알았다. 죽고 싶더라. 근데 다른 사람들 다 축소할 때 나는 사업 확장을 결정했다. 3년 만에 대박 쳐서 지금의 빌딩을 마련했다.

-만화를 넘어서 트렌드를 반영해 중장년층까지 끌어들인 <신의 물방울>이 학산을 알리는 데 도움을 준 대표작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비결은 무엇인가. =광고를 일체 안 한다. 잘 만들면 팔리는 거지 팔려고 노력하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항상 남이랑 똑같으면 성공할 수 없다. <슬램덩크> 잘될 때라고 농구만화 해봐야 될 리가 없다. 남이 안 하는 걸 해야 한다. 봉급쟁이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 하고 해야 살 수 있다. 나는 몇번을 죽다 살았지만, 계속 새로운 걸 한다. 여전히 3년 뒤에는 또 어떤 고비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산다.

-학산의 끊임없는 도전 원칙이 결국 SICAF의 변화에도 적용될 거란 기대다. =올해가 중요하다. 최근 들어 너무 변화없이 지속되어왔다. 서울시 예산이 10년 단위인데 그런 문제들에도 대처를 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뒤집어서 봐야 한다. 변화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기 전에 먼저 변화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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