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유학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방송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었다. 정서에도 기후가 있다면 독일사회는 한랭건조하고, 한국사회는 고온다습하다. 건조한 기후에 살다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찬 습식 TV를 보는 것은 한랭건조한 기후 속에 살다온 사람에게는 정서적으로 힘이 드는 일이었다. 장르의 구별 없이 모든 프로그램이 ‘드라마’를 지향하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뉴스의 리포트 꼭지에조차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적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놓는 관습이었다.
모니터에 흐르는 눈물
옛날에는 동네 영화관의 영화에 비가 내리곤 했는데, 요즘은 HD TV 모니터에 비가 내리는 듯하다.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 보니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배우가 울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참가자가 울고,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합창단원 전체가 운다. 하지만 TV가 흘리는 눈물에도 10년 사이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10년 전에는 그 눈물이 삶의 절절함에서 나왔다면 요즘은 그 눈물이 주로 프로그램이 연출하는 가상의 상황 속에서 인위적으로 제작된다는 느낌이다.
식민지 시절 창극에서 연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신파극’이라는 게 있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이라는, 이제는 거의 관용어가 된 표현은 원래 신파가 자아내던 정서적 효과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90년대 초에 어느 극단에서 이 신파극을 그대로 재현한 적이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객석에 눈물의 바다를 연출했던 이 공연을 보며, 현대의 관객은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신파의 관습적 장치와 배우의 과장된 연기가 현대의 감성에는 그로테스크하게, 말하자면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지금 우리가 보는 TV 프로그램들을 50년 뒤의 우리 후손들이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는 지금보다 연출기법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을 테니, 50년 전의 낯선 연출 기법을 보며 아마 박장대소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신파의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프로그램들이 네오-신파로 가득 차 있듯이, 50년 뒤의 우리 후손들 역시 (그로부터 다시 50년 뒤에 자기 후손들에게 비웃음 당할) 또 다른 신파를 개발해 즐기고 있을 테니까. 공동체의 정서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고전주의자들이라면 이 감정의 과잉을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고대미술모방론>에서 빙켈만은 고전적 아름다움은 ‘라오콘 군상’이 보여주듯이 ‘고귀한 단순함과 위대한 고요함’에 있다고 말한다. “폭풍우가 바다의 표면에 몰아친다 해도, 바다의 아래는 평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의 아름다운 형상들의 표정은 가장 격렬한 충격과 가장 무서운 격정 속에서도 늘 위대하고 고요한 영혼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모방해야 할 그리스 예술의 미적 이상이자, 동시에 그리스 문화의 이상적 인간형이라는 것이다.
이 ‘위대한 고요함’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헬레니즘 시대의 명작 ‘라오콘 상’이다.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은 동료 시민들에게 목마를 성 안에 들여놓으면 도시에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로이의 멸망은 신들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를 천기누설이라 여긴 신들은 거대한 바다뱀을 보내 그와 그의 자식들을 물어죽이게 한다. 하지만 고대의 시 속에서 라오콘은 창을 들고 바다뱀에 과감히 맞서며, 고대의 조각 속에서 라오콘은 바다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극한적 고통 속에서도 영혼의 평정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는 데서 영혼의 위대함을 보는 빙켈만의 고전주의 미학은 괴테나 실러와 같은 대문호를 거치면서 거의 독일의 국민적 미감으로 자리잡는다. 독일인들의 한랭건조한 정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전주의 미학이 그것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리스인의 이상이었던 ‘칼로카가티아’가 미적 가치(美)와 윤리적 가치(善)를 통합했던 것처럼 고전주의 미학 역시 독일에서 예술을 위한 미적 이상이자 인간을 위한 윤리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동북지방에서 지진으로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침착한 대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는 아마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가령 거기에는 국가에 대한 비판을 일체 허락하지 않는 일본사회의 보수적 분위기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요인은 일본 특유의 유미주의 문화로 보인다. 독일의 고전주의에서 감정을 표출할 때조차도 위대한 고요함을 요구하듯이, 일본의 사무라이 미학은 무사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여 그 어떤 고통의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파토스가 넘치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다. 진주만 기습의 영웅 야마모토 제독이 전사했을 때, 일본은 이 국민적 영웅의 마지막 길을 국장(國葬)으로 배웅했다. 그때 제독의 부인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일체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관을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녀는 딱 한 방울의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이 눈물의 ‘농도’는 그 어떤 눈물의 양으로도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리라. 이 얘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본인 특유의 유미주의 정서는 이런 부류의 얘기에서 진한 감동을 먹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 이 유미주의가 괴이함으로 치달을 때도 있다. 언젠가 김선일씨가 이라크 반군들의 손에 참수당했을 때,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공개된 적이 있다. 지인을 통해 듣자 하니 그가 아는 일본인이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한국인은 어떻게 죽는지를 몰라.”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비는 것이 그의 사무라이 감성을 거슬렀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듣고, 지인에게 그 일본인에게 이렇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맞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죽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죽는지를 모른다.”
같은 책에서 빙켈만은 ‘파렌티르소스’(parenthissos), 즉 감정과잉의 오류에 대해 얘기한다. 이는 우리도 일상에서 종종 범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가령 감상에 젖어 밤에 쓴 일기를 벌건 대낮에 읽어보라. 얼마나 민망하던가? 파렌티르소스의 오류에 빠진 작가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켜보는 독자나 관객은 더 민망해질 뿐이다. ‘웃음’도 마찬가지다. 농담이 효과적이려면 농담을 하는 이는 웃지 말아야 한다. 농담을 하는 이가 먼저 웃어버리면 정작 웃어야 할 청중은 웃지 못하고 분위기만 썰렁해질 것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파토스가 넘치는 사회에서는 눈물의 과잉이 미학적 ‘오류’라기보다는 인간적 ‘공감’의 통로로 여겨진다. 눈물을 생산하는 방송의 테크닉은 날로 세련되고 복잡해지겠지만 ‘눈물’을 통해 교감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정서는 영원하다. 이런 나라에서는 최첨단 HD 모니터 위에도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보드리야르였던가? 토털 스크린에 대해 얘기한 것이. 과거의 눈물이 카메라가 비추는 삶에서 나왔다면 지금 모니터 위의 눈물은 방송사에서 연출한 가상의 상황 속에서 생산된다. 한국에서 토털 스크린은 이렇게 토털 신파와 결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