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를 불문하고 <작은 아씨들>에 좋은 기억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책과 글을 좋아했던 소녀라면 자신 역시 조세핀이 된 기분으로 꿈에 잠겼을 법하고, 소년들은 사랑스러운 자매들과 점차 가까워지는 로리 로렌스처럼 수줍은 기분으로 각 소녀들의 매력에 가슴을 설을 법하다.
위노나 라이더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했던 영화판들 역시 매력이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작은 아씨들’이다. 크리스마스날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의 ‘다음에 만날 때까지는 모두들 작은 아씨들이 되어 있기를’이라는 강령에 따라 모두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천로역정을 매뉴얼 삼아 밤낮 분투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왠지 우스꽝스럽고 귀여운데 동화용으로는 교훈적인 면만 강조한 때문인지 이들의 인간적인 면은 꽤 사라졌다. 이를테면 갸륵하게도 어머니의 여비를 위해 아끼는 머리채를 잘라 판 조가 침대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메그가 “울지 마, 아버지는 곧 나아지실 거야”라고 위로하자 “난 내 머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라고 대꾸하는 장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범의 화신들보다 얼마나 깜찍한가.
미와 다정함의 아이콘 같은 메그 역시 삽질에서는 동생에게 지지 않는다. 부르크 선생이 은근히 마음에 들지만 막상 그의 청혼은 마구 튕기면서 뻐기다가 때마침 방문한 마치 할머니가 다짜고짜 메그에게 “저런 놈과 결혼할 생각이냐”라고 흥분하자 갑자기 “내 결혼은 내가 하는 거예요”라고 같이 발끈한다. 이러다 상황이 우습게 돌아가 그만 그와의 약혼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언니가 능글맞은 구혼자를 격퇴했을 것이라 믿었던 조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러브신이 펼쳐지고, 뛰쳐나와 “누가 이리 와 봐요, 부르크가 메그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 메그가 그걸 좋아하고 있어요!”(!!)라고 생생하기 짝이 없는 표현으로 고래고래 고자질하지만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고 되레 새로운 커플을 축복하자 조는 다락으로 뛰어가 충직한 쥐들에게 이 슬픔을 하소연한다.
주인공답게 조의 기박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속편 <행복한 신부들>에서 가족들에게 “나는 누구 신세를 지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야”라고 토하는 열변을 하필 오랜 꿈인 유럽여행 동반을 제의하러 온 친지들이 밖에서 듣는 바람에 “신세 지는 것이 저렇게 싫다니 어쩔 수 없겠군…”이라는 상황이 전개되어 행운을 잡은 것은 엉뚱한 에이미. 조에게 걷어채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도피성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에이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뒤 집으로 돌아온 로리는 조에게 고백한다. “내 마음속에서 너와 에이미는 한 사람과도 같아.” 갓 결혼해서 처음 처가를 방문한 새 신랑이 처형에게 하는 말치곤 참으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이만하면 어린이 명작은커녕 치정소설의 반열에 올라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터인데, 메그가 돈없는 가정교사한테 시집가서 밤낮 살림에 허덕거리는 모습이 리얼한 것을 보면 어쩌면 진정한 성장소설 같기도 하다. 소녀들에게 ‘자 봐라. 이런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전편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베스는 로리에 대한 외사랑을 품고 상사병으로 끝내 세상을 뜬다. 죽기 전에 ‘왜 다들 집을 떠나려고만 하지? 언제까지나 같이 살면 좋을 텐데. 나는 집이 가장 좋아’라며 호러영화 분위기로 섬뜩하게 중얼거리는 장면은 ‘나는 죽어서도 집이 좋아’라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귀신으로 재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이 오싹하다. 어쨌거나 결국 우리의 조세핀 마치는 주변의 경악을 뒤로 하고 무지 늙은 프레드릭 선생과 결혼해버린다.
작은 아씨들의 ‘우먼’과 같이 ‘레이디’를 밤낮 강조하는 애니메이션 <작은 숙녀 링>의 원작 코믹스의 엔딩은 더더욱 고단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셔, 사랑하는 남자는 형부가 돼버려, 계모가 아들을 낳는 통에 상속권이고 뭐고 넘어가, 참으로 인생이란 심란하기 그지없다. 혹여 어린 시절의 추억을 훼파하였다고 분노하지는 마시길. 어찌 그들은 밤낮 이슬만 먹고 살겠으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열여섯살로 남길 수야 있으리. 꽃은 지고, 일출은 한순간인 법. <빨간머리 앤>의 몽고메리가 쓴 ‘에밀리’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자. 열렬한 작가지망생 에밀리 스타는 격한 성격의 단짝인 아일즈 번리와 종종 다투곤 하는데, 어느날 장난감 집 문제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일즈는 에밀리에게 말한다. “내가 너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면 목을 매달아 자살해 버리겠어.” 에밀리는 대답한다. “내가 밧줄 살 돈을 보내주마.” 사실 소녀들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멋진 존재다.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서식중. 정확한 거처 불명. 키워드는 와일드터키, 에반윌리엄스. <누가 뭐래도 버번은 007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NEO_HEART_BREAKER@HOTMAIL.COM(하트브레이커는 <하트브레이커스>가 아니라 하트브레이커 ‘더 키드’ 숀마이클님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