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영상매체가 되었다. 그 명칭이 시사하는 ‘계산’의 이미지는 오늘날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의 기능 전환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 소수의 엔지니어들은 이미 컴퓨터를 예술적 매체로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탄생한 것이 컴퓨터 생성음악. 컴퓨터그래픽은 그보다 늦은 60년대 초반에 시작된다. 그래픽이 사운드보다 늦었던 것은, 데이터를 선형적으로 처리하는 컴퓨터의 속성에서 비롯된 현상이리라. 음악은 선형적이나, 그림은 동시적으로 지각된다.
예술은 정보다
최초의 컴퓨터그래픽은 ‘공식적으로는’ 독일에서 탄생했다. 1963년 지멘스사(社)의 프로그래머였던 게오르크 네스는 12줄의 문장으로 된 프로그램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명령은 간단했다. ‘8개의 점을 무작위로 산포한 뒤, 그 점들을 선으로 이어 닫힌 도형이 되게 하라.’ 문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이 문장을 컴퓨터는 작도기를 통해 이미지로 출력했다. 같은 시간에 슈투트가르트대학 전산센터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프리더 나케 역시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초기 컴퓨터그래픽은 ‘미는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가령 랜덤하게 점을 산포하라는 명령은 ‘무질서’를, 이리저리 선을 이으라는 명령은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 질서와 무질서의 균형을 통해 화면엔 미적인 대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무질서(엔트로피) 속에서 질서(정보)를 집어넣는 방법은, 주사위의 한쪽 귀퉁이에 납 조각을 박아 넣는 야바위꾼의 수법을 닮았다. 이 경우 야바위꾼은 물론 주사위 던지기에 관해 남들이 갖지 못한 ‘정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보다 좀 늦게 일본에서는 도쿄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가와노 히로시가 인간의 그림을 시뮬레이션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방법의 요체는, 인간의 그림을 스캔하여 확률분포를 파악한 뒤 같은 확률분포를 가진 작품을 생성해내는 데에 있었다. 이 경우 자료로 사용된 인간의 작품과 출력된 기계의 작품은 동일한 확률분포를 갖고 있기에 어느 정도 서로 유사성을 보여줄 것이다. 이 경우 메모리(마르코프 체인)를 늘릴수록 기계의 작품은 인간의 것을 더욱더 닮을 것이다.
증거의 부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최초의 컴퓨터그래픽은 미국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벨연구소의 마이클 놀은 1962년 프로그램 오류로 출력된 자료를 보며 동료들과 농담을 했다. “야, 이거 추상예술인데?” 농담은 프로그램 오류로 작품을 만들자는 발상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작품이 뉴욕의 한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 ‘쓸데없는 짓에 재원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우려한 연구소쪽에서는 연구원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으나 활동을 공개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실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놀은 자신이 생성해낸 작품에 ‘카피라이트’를 걸어놓기로 한다. 하지만 미국의 특허청에서는 “랜덤 프로세스가 들어 있는 한 인간의 저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 다시 편지를 보내 “그 랜덤 프로세스도 결국 내가 프로그래밍한 것”이라 주장하자, 특허청에서는 그제야 수긍을 하며 그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는 놀이 생성예술을 인간의 작품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놀은 생성된 작품에 자신의 사인, 아니 아예 ‘@’ 기호를 붙여놓았다.
이는 독일과 일본의 컴퓨터 예술가들이 ‘예술가-컴퓨터’를 만들려고 했던 것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독일과 일본의 컴퓨터 예술이 ‘정보미학’이라는 이론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공리주의적 이상을 추구했다면, 미국의 컴퓨터 예술은 ‘카피라이트’라는 자본주의적 권리와 더불어 처음부터 실용적 목표를 지향했다. 놀에게 컴퓨터는 그저 인간의 창작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70년대 중반 이후 컴퓨터 문화는 그래픽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시장에 종속된다.
자신을 “공산주의의 동조자”라 여기는 가와노 히로시는 컴퓨터 문화의 이 자본주의적 전개에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컴퓨터 예술은 사회주의적·공리주의적이어야 한다.” “컴퓨터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컴퓨터로 그림 한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회사를 만들고, 공원을 만들고, 나라를 만들고, 세계 전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바우하우스가 생각한 게 바로 그게 아닐까?”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컴퓨터 문화는 완전히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해버렸다.
사회주의와 공리주의
오늘날의 컴퓨터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구입하여 프로그래밍하지 않고 오직 제품의 매뉴얼만 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 역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종종 이것을 이렇게 바꾸고 싶은데, 그게 이 소프트웨어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고 말하나, 실은 소프트웨어에게 사용당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엔 예술가들마저 ‘프로그래밍하는 자’가 아니라 ‘프로그래밍당하는 자’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그래픽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없던 시절, 그는 문자숫자 코드로 프로그램을 짜고, 이를 0과 1로 펀칭하여 입력하고, 기호와 숫자로 출력된 데이터 위에 색연필로 덧칠을 하고, 도화지 위에서 그것을 물감으로 전사해야 했다. 이때만 해도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이 문자숫자 코드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어떤가? 그래픽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덕분에 그들은 거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입력을 하고 출력을 한다. 여기에는 모종의 ‘존재망각’이 있다.
가와노의 이상적 컴퓨터 문화는 모든 이가 자기 자신과 생활 세계를 스스로 프로그래밍하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화를 의미하는 지구화 과정에서 컴퓨터 문화는 획일화, 등질화해버렸고 그 속의 인간은 세계의 생산자가 아니라 한갓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소비자가 되었다. 그들을 가리켜 ‘사용자’(user)라 일컬으나, 가와노의 말대로 그들은 어쩌면 ‘사용당하는 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오늘날 컴퓨터 이미징의 모토. ‘이런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 그럼 이 제품을 사라.’
그의 생각에는 초기 바우하우스의 낭만적 반자본주의가 깔려 있다. 오직 생산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끔찍한 모양의 저가품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에 맞서 바우하우스의 장인들은 산업생산에 공예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바우하우스가 사회주의 교장 밑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바우하우스 운동은 미국식 포디즘과 결합한 뒤에야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이상은 사라지고 ‘산업디자인’만 남았다.
오늘날 컴퓨터 예술과 문화에서 벌어진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제 손으로 펀칭을 하고, 제 손으로 데이터에 색칠을 했던 가와노는 산업생산 이전의 장인을 닮았다. 기계생산의 시대가 공예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듯이, 오늘날 컴퓨터 문화에서 초기 컴퓨터 예술가들이 했던 것과 같은 프로그래밍은 존속하기 어려워졌다. 오늘날 하드웨어의 제작과 소프트웨어의 프로그래밍은 개인적 창작이 아니라, 대자본의 투자를 받아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산업적 활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장에 종속된 컴퓨터 문화에 대한 가와노의 반감은 그로 하여금 PC를 포함하여 일체의 디지털 기기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디지털 시대에 이메일 계정마저 없는 노인의 급진적 거절은 잘못 발전된 컴퓨터 문화에 대항하여 그가 보이는 바틀비의 제스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