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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도 꺼지지 않는 희망 탐구

2011 골든글로브·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석권한 수잔 비에르의 <인 어 베러 월드>

더 나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지금 세상이 예전보다 더 나은 세상일까, 아니면 다음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일까, 그것도 아니면 태고의 시간이 이미 더 나은 세상이었을까. 덴마크의 흥행감독이자 할리우드의 새로운 ‘외국’감독으로 촉망받고 있는 수잔 비에르의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매우 예민하고 스타일리시한 방식으로 세상의 상태에 대해 질문한다. 올해 골든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모두 석권한 영화다.

<인 어 베러 월드>의 초반부에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한명은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는 의사이며 또 한 사람은 덴마크의 한적한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년이다. 두 사람의 배경에 관하여 영화는 그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할 경우 우린 두 사람의 관계를 궁금해한다. 저 소년과 의사는 어떤 관계일까. 대개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한다. 소년은 의사의 아들일 것이다. 지금 그는 아프리카에 있고 소년은 덴마크에 있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저 소년은 의사의 유년 시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지금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미 둘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인 어 베러 월드>의 소년과 의사는 아직은 아무 관계가 없다. 적어도 아직은 아무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 불려와야 한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완전히 무관한 두 사람의 이야기로 일단 영화를 시작한 다음 그들 사이에 있는 한 인물로 시선을 모으고 그런 다음 둘의 관계를 맺어주기 시작한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의사 안톤에게는 아내 마리안느와 열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 엘리어스가 있다. 안톤은 구호활동에 힘쓰느라 집에 있을 시간이 없고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외도 때문에 관계가 나빠져 사실은 아내와도 별거 중이다. 자연스럽게 아들 엘리어스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빠와 함께하지 못한다. 심약한 엘리어스는 학교의 덩치 큰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일쑤다. 우리가 말한 의사란 엘리어스의 아버지 안톤이다. 한편, 엘리어스의 반으로 전학을 오게 된 소년 크리스티안은 얼마 전 엄마를 잃었고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집으로 이사 와 살고 있다. 크리스티안은 엄마의 죽음을 어쩌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크다. 대상도 이유도 없는 무언가에 분노를 느낀다. 괴롭힘을 당하는 엘리어스를 도우려다 자신까지 폭력의 희생자가 되자 크리스티안은 상대에게 무서운 방식으로 되갚아준다. 그걸 계기로 엘리어스와 크리스티안은 단짝이 된다. 크리스티안이 우리가 말한 소년이다.

진보된 문화가 더 나은 세상의 모델일까

도그마의 계보 안에서 시작했으나 이내 덴마크의 엄청난 흥행 감독이 됐고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할리우드 데뷔작도 남긴 감독 수잔 비에르는 <인 어 베러 월드>로 올해의 골든글로브를 가져가더니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까지 연이어 받았다. 그녀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은유컨대 대개 가장자리에 서 있고 혼란에 빠져 있다. 가령 수잔 비에르는 <인 어 베러 월드>에서도 엘리어스를 사이에 놓고 안톤과 크리스티안을 양쪽 가장자리에 첨예하게 세운다. 이러한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우리의 개인적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회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제한들을 탐구하기 위해 시작됐다. 우리 자신의 이른바 ‘진보된’ 문화가 더 나은 세상의 모델인지 혹은 문명이라는 우리의 표면 아래 무법천지의 혼잡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카오스에서 면제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질서의 가장자리에 선 채 흔들리고 있는가.” 감독이 밝힌 이 영화의 동기인데, 조금 추상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영화 속 의제를 드러내어 경유하면 좀더 가깝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인 어 베러 월드>는 폭력과 그 폭력에 대한 상반된 대응방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로써 이 사회의 어떤 취약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지켜야 할 인류애적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인 어 베러 월드>에서 폭력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 우선은 가장 작은 폭력이 등장한다. 매일같이 엘리어스를 괴롭히던 덩치 큰 녀석. 크리스티안은 결국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해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한다. 그런데 두 번째 폭력, 어른들 사이의 폭력은 좀더 복잡하다. 안톤이 엘리어스와 크리스티안이 보는 앞에서 한 남자에게 따귀를 맞는 일이 벌어진다. 안톤은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대응하지만 상대는 막무가내다. 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세 번째 폭력은 문명과 관련된다. 안톤이 일하는 아프리카의 난민촌 주변에는 사람의 배를 장난처럼 가르는 악당 패거리가 서성인다. 그런데 그 악당이 어느 날 다리를 다쳐 안톤이 일하는 구호소로 들어오게 된다. 감독은 “아프리카의 난민촌이나 덴마크의 상류층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폭력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복수와 용서의 문제는 사람이 살아가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인 아프리카 장면보다는 덴마크의 한적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훨씬 주목도가 높다. 어리지만 냉혹한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힐 때 전해져오는 섬뜩함,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 앞에서 남에게 따귀를 맞을 때의 수치심. 이 영화는 그런 장면들의 감정의 밀도를 높인다. 결국, 안톤은 대화로 상대를 승복시키겠다며 다시 사내를 찾아가지만 크리스티안은 엘리어스에게 너의 아버지의 따귀를 때린 그 남자의 차를 폭파하자며 복수를 부추긴다.

폰 트리에와 비에르의 폭력에 대처하는 덴마크식 두 가지 방식

<인 어 베러 월드>의 등장에 이르러 우린 마침내 존재론적 폭력을 경유하고 그 폭력에 대처하는 덴마크식 두 가지 방식 중 두 번째를 올해 만나게 된 것이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라스 폰 트리에다. 수잔 비에르와 라스 폰 트리에는 서로 반대편에 있다. 올해 세계 영화계의 폭탄급 이슈가 됐던 라스 폰 트리에의 나치 발언이자 질 나쁜 농담이 “수잔 비에르(유대계 덴마크 감독)가 등장하고 나서는 더이상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행복하지 않았다”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그 구도는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 영화 속의 구도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인 어 베러 월드>에서 크리스티안은 폰 트리에식 인물이다. 크리스티안은 안톤을 때린 남자를 가리키며 “그는 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안톤이 수잔 비에르식 인물이다. 안톤은 크리스티안에게 “그 남자가 진 것”이라고 말하며 비폭력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인 어 베러 월드>는 크리스티안과 안톤의 대결이며 결국에는 수잔 비에르의 인물이 폰 트리에 인물을 타이르고 교화해내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본성처럼 상존하는 폭력에 대처하는 덴마크식 두 가지 영화 방법론 중 나머지 하나는 수잔 비에르식 평화 만들기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허세처럼 보이는 것만큼 수잔 비에르의 영화가 가식처럼 보인다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이 허세와 가식 중 어느 것도 놓아버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긍정형으로 자문하는 게 더 낫겠다. 사라지지 않는 폭력의 본성을 과장하여 드러내는 것과 폭력으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인류애에 입각하여 돌보는 것 중 무엇을 더 믿어야 할까. 아니, 어쩌면 한쪽을 버릴 것이 아니라 둘 다 믿고 취하는 것이 진실일까? 이때 적어도 수잔 비에르의 확신은 라스 폰 트리에의 확신만큼이나 확고하다. 그녀는 세상의 희망을 믿느냐는 질문에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다. 그게 아니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잔인하고 심각한 주제도 그 안에 희망을 담고 있다면 관객에게 건네질 수 있다. 관객이 아주 우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할 수도 있고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관객에게 희망을 가득 담은 현실 감각을 주입해주고 싶었다. 영화 속이 아닌 실제 우리 삶 속에서도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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