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효선(30)씨는 칭찬에 유독 부끄러워했다. 스스로는 시네필보다 문학도에 가깝다고 밝히지만 일단 관심이 가는 영화감독이 생겼다 하면 전작을 몰아 보고 글로 기어이 정리를 해내는 타입이다. 서울대 영문과 박사과정 중이고 이번 학기에 수료한다. 3년 전에는 다르덴 형제 작가론을 써서 최종 심사까지 올랐다가 고배를 마셨고 올해 두 번째 도전 만에 당선됐다. 장기적으로는 좋은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한번 뛰어든 이상 영화평론가의 길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언제부터 영화에 관심을 뒀나. =7∼8년 전에 영상제작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비로소 스토리가 아니라 요소별로 영화를 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때 해보고 영화연출에 대한 꿈은 깨끗하게 접었다. 누구도 봐서는 안되는 영화 한편을 남겼을 뿐이다. (웃음) 평론가라는 직함은 아직 부담스럽다. 다만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론은 <안티크라이스트>를 썼다. =다시 볼 용기는 나지 않는 영화지만, 역시나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기존의 다른 글들에서 얘기되지 않은 부분들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론비평으로 쓴 미하엘 하네케도 라스 폰 트리에만큼이나 쟁점의 작가다. =사실 둘 다 즐겨 보지는 못한다. (웃음) 다르덴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하네케와 폰 트리에는 중요하고 또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평론가로서 장기적으로 활동할 의향이 있나. =물론이다. 두려움도 좀 있지만… 기회가 되면 긴 호흡의 감독론을 써보고 싶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거나 나의 기호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 건 피하고 싶다. 그렇게 쓰면 선정적인 글이 되고 나중에 보면 창피하니까. 영화평도 그걸 유의하며 쓰려고 한다.
김효선
그의 외설적 진실
나는 내 모든 영화가 외설의 한 요소라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카엘 하네케)
1. 우리는 ‘진실’이 모순어법을 통해서만 통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불편한 진실’이거나 ‘부끄러운 진실’이다. 적어도 근 몇 년 동안 나는 ‘아름다운 진실’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진실은 스스로 현현하는 해석학적 ‘진리’는 고사하고 객관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인 ‘사실’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대체로 감추고 싶은, 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 추함이 전염이라도 되는 양,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고 우리는 기억상실에 능하다. 다행일까, 상처를 가리고 포장하는 기술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예술품은 때때로 기억상실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그것은 상처를 잘 봉합해서는 현실을 낙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판타지는 붕괴된 현실관계의 틈새를 메우고, 스크린에 펼쳐진 긴박한 몸싸움은 사람들의 지친 영혼을 자극적 이미지로 위로한다. 우리는 영화관을 찾고, 또 치유를 받는다. 상처를 상기하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술로 혈서를 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퇴행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봉합된 환부를 다시 절개해 뚝뚝 흐르는 핏물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도 그렇다. 그가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은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사회적, 정신적 상처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우발적으로 노출되고 러닝타임 내내 집요하게 전시된다. 그가 카메라를 흔드는 재주를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그의 정적인 구도로부터 흔히 현기증을 느낀다.
하네케는 <피아니스트>(2001)와 관련한 인터뷰(Cineaste, summer 2003)에서, 그의 영화에 드러나는 상처들의 속성을 ‘외설적’이라 설명한 바 있다. 이때 외설은 포르노그래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래피는 관습을 거스르는 삶의 요소들을 소비재로 만든다. 하네케의 초기작들이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유는, 미디어가 상업논리에 부응해 사회적 환부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매끈하게 봉합하고 있는 모든 예술적 관행들은 포르노적이다. 반면, 제도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예술적 시도들은 외설의 요소를 갖는다. 그의 관점에서, 외설은 현실에 대한 조작을 이끄는 모든 억압적 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은폐된 상처들을 추한 모습 그대로 드러내 직시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외설은 결국 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폭력, 섹슈얼리티, 등 사회적 금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네케의 모든 도발은 진실을 탈은폐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단순히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관객이 현실에 대한 반성을 회피하지 않고 그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문제를 포괄한다. 그의 ‘외설성’은 사회적 환부에 접근하는 일종의 윤리적인 태도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클로즈업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곱 번째 대륙>(1989)에서부터 고요한 흑백화면 속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는 <하얀 리본>(2009)에 이르기까지, 하네케의 영화들은 모두 외설로서의 진실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때로 카섹스 중인 차 옆에서 오줌을 싸고 있는 여자의 뒤통수를 보아야만 하고, 살인을 저지른 뒤 바닥에 흘린 피를 무심히 닦고 있는 소년의 손동작을 감당해야 될 때도 있다. 하네케의 인물들은 줄곧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 놓이고, 그 상황은 순식간에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바로 그 통제 불능의 혼란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억압적인 사회 논리를 감지하고 자기기만을 이어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게 된다.
2. 하네케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고정된 카메라로 찍는 롱테이크 숏일 것이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1994)이나 <미지의 코드>(2000)를 채우고 있는 쁠랑 세깡스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도 영화의 분기점을 이루는 중요한 장면에서는 줄곧 롱테이크 숏이 쓰이고 있다. 게다가 하네케는 이들 숏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가급적 자제한다. <하얀 리본>은 돌출된 롱테이크 숏을 찾아보기 힘든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겠지만, 하네케는 작품에 관한 인터뷰(Cineaste, Winter 2009)를 통해서 아역배우를 컨트롤해야 하는 상황과 대사 위주의 극적 조건이 해당 기법을 고수하기 힘들었던 이유였음을 밝힌 바 있다.
하네케의 롱테이크 숏은 기본적으로 같은 기법을 활용한 고전 작가들의 취지와 닿아 있다. 편집이 중첩될수록, 관객은 현실을 절합한 왜곡된 이미지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기 쉽다. 이에 반해 편집을 배제한 숏들은 시공간의 연속성 속에서 관객이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관객의 몰입은 차단되는 반면, 현실에 대한 사유의 기회는 늘어난다. 이를테면, 하네케는 현실에 대한 인위적인 왜곡을 극소화하려는 바쟁의 윤리적인 태도를 이어받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롱테이크는 일종의 ‘외설’적인 양식인 것이다.
관객들은 그의 롱테이크 숏이 폭력을 다룰 때, 종종 불쾌감을 느낀다. 이 불쾌감은 물론 그가 철저히 의도하는 바다. 폭력은 추한 것이며, 폭력이 남긴 상처는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일부 상업 영화들은 이 끔찍한 상처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관객들은 별 불편 없이 폭력 장면을 소비한다. 그는 이들 관객의 비반성적인 몰입이야말로, 폭력의 실상을 은폐하는 걸림돌이라 판단한다. 그가 “폭력과 미디어”라는 짧은 글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그의 고민은 폭력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폭력의 묘사와 관련해 관객의 위치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폭력 장면을 다루는 하네케의 집요한 롱테이크 숏은 관객의 거리두기와 반성적인 사유를 위한 것이다. 그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지우고 폭력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든 스타일리쉬한 폭력물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의 롱테이크 숏에는, 예컨대 샘 페킨파가 컷을 쪼개고 슬로우 모션을 동원하여 죽음을 즐겼던 식의 가학적인 면모가 없다. 하네케는 폭력 행위 자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하네케의 영화에서 페킨파의 슬로우 모션에 해당할만한 살육 장면은 단 한번 등장한다.
<베니의 비디오>(1992)는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때 영화는 테이프를 되감아 도살 순간을 한 번 더 보여준다. 두 번째의 도살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어 일종의 비장미를 드러내고,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이 살육 장면에 서정성마저 부여한다. 물론 이 숏은 베니가 녹화한 테이프 속의 한 장면이다. 비디오광인 베니는 폭력이 주는 쾌감에 경도되어 있다. 원래 속도와 슬로우 모션이 연속된 이 비교 장면은, 폭력의 미학적인 전유가 어떻게 폭력의 잔학성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베니에게 비디오 안과 밖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는 어느 날, 그저 그 느낌을 알아보고 싶어 우발적으로 한 소녀를 살해한다.
그러나 베니가 소녀를 살해하는 문제의 시퀀스에서 정작 폭력 행위는 프레임 밖에 있다. 소녀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베니는 그녀를 프레임 바깥으로 옮기고는 방을 가로지르며 분주히 움직인다. 시종일관 텔레비전 브라운관만을 비추고 있는 이 롱테이크 숏에서, 소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관객은 그 울음소리를 통해 화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실상을 가늠하게 된다. 베니는 한참 만에 다시 한 번 총을 쏘아 그녀를 확실히 사살한다. 꽤 긴 시간 동안, 육체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지만, 그 어떠한 가학 행위도 화면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퍼니 게임>(1997/2007)의 살인 역시 프레임 밖에서 일어난다. 청년 일행 중 한 명이 어린 아들을 죽이는 순간은, 나머지 한 명이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그의 손이 빵을 가르고 버터를 꼼꼼히 바르는 동안 한 발의 총성, 자동차 랠리를 중계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소음, 그리고 여자의 비명 소리만이 제시될 뿐이다. 관객이 직접 보게 되는 것은 살인 행위가 아니라, 그 이후의 처참한 광경이다. 카메라는 피범벅이 된 텔레비전을 클로즈업으로 비춘 뒤, 방문자들이 떠난 거실의 전경을 롱테이크 숏으로 담아낸다. 커다란 소파 너머로 남자의 다친 다리가 보이고, 아이의 시체는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다. 랠리의 중계방송이 시끄럽게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몸을 구부린 채 망연히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결박된 몸을 일으켜 텔레비전을 끈다. 그녀가 프레임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남자의 몸을 부축하는 십 분여의 긴 시간 동안, 카메라는 약간의 패닝을 할 뿐 시종일관 고정되어 있다.
하네케의 카메라는 침착하게 폭력의 잔해들을 응시한다. 이 숏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철저히 무력해진 가족의 모습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인물에 대한 육체적, 심리적 고문을 지켜보며, 관객은 화려한 액션물에서 경험하던 쾌감이 아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로 멀어져 폭력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를 떠안게 된다. 폭력의 실상은 이 장면에서 하나의 외설로서 드러난다. <퍼니 게임은>은 폭력을 포장하는 모든 판타지들에 대한 폭력 자체의 돌발적인 공격을 담고 있다.
<히든>(2005) 역시 고정된 카메라에 의지한 롱테이크 숏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예다. 주인공 조르주의 두려움은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촉발되며, 그 감시의 증거는 건물을 찍은 고정된 롱테이크 숏에 있다. 마지드가 스스로 목을 자르는 아파트 시퀀스에서도 하네케는 정적인 롱테이크를 구사한다. 정면의 낡은 벽지에 마지드의 피가 솟구치고, 그는 바닥으로 쓰러진다. 목에서 핏물이 흐르는 소리와 나지막한 신음이 화면을 채우는 동안, 조르주는 화면 중앙을 맴돈다. 그가 기침을 내뱉고 마침내 숏이 끝날 때까지, 화면은 돌발적인 죽음이 현실로 인식되는 동안의 시간적 추이를 그대로 담는다. 이 숏에서 마지드의 죽음은 명백히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동시에 그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사적, 사회적 문제들이 탈은폐된다.
하네케의 롱테이크 숏은 윤리를 지향한다. 그것은 진실을 하나의 외설로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진실은 봉합되지 못한 추한 상처의 모습이기에, 관객들은 환부를 들여다보는 그의 롱테이크 숏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관객이 불편함 속에서 인물들의 공포와 혼돈을 ‘관찰’하는 동안 현실에 대한 반성적인 거리가 확보된다. 하네케의 정적인 롱테이크 숏을 감당해 내는 일은, 익숙하지만 우리가 줄곧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진실과 만나는 경험이다. 관객은 그의 롱테이크 숏들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노출되는 휴머니티의 실상과 그 자체가 폭력의 역사로 이루어진 문명의 위협적인 실체를 조금씩 체감하게 된다.
3. 진실이 규범에서 벗어난 외설로서 성립한다면, 인간 존재를 잠식하고 있는 억압적 규범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사회규범에 의해 억압된 일탈적인 문제들이 돌출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일상을 장악하면서, 은밀히 자행되던 억압의 생리가 역으로 노출된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일정 부분 추리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원인 모를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네케는 범인을 철저히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책임을 묻게 되는 역설을 구사한다.
하네케의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주로 가정이다. <퍼니 게임>의 가족들은 휴가지에서 몰살을 당하고, <일곱 번째 대륙>의 가족은 집단 자살을 한다. <늑대의 시간>(2003)같은 작품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구 문명의 이기와 위선이 그가 다루고 있는 주요 화두인 것을 감안한다면, 가정은 문명의 소우주로서 사회적인 내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틀이 된다. 가정의 붕괴를 통해서 사회제도의 맹점이 드러나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 이데올로기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각종 갈등을 유발하며, 가정 내적, 외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여성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상처는 모녀관계의 편집증적인 보존 욕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히든>의 갈등 역시 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동반한다. <히든>은 성공한 TV토론 진행자 조르주가 가족과 명예 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황폐해져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 조르주가 마지드에게 주었던 상처는 자신이 받던 혜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 조르주는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범죄자의 누명을 씌우는 이기심을 보인다. 그는 마지드를 자살로 몰아간다.
자신을 둘러싼 틀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조르주만의 일이 아니다. 조르주의 과오는 1961년에 일어난 파리대학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집으로 찾아온 익명의 비디오테이프는 그 자신의 죄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행했던 끔찍한 역사적 범죄와 이후 벌어진 은폐에 대해 책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집단 결속을 구실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죄의식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저지르는 모든 테러리즘을 향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네케는 조르주 부부가 보는 텔레비전에서 중동 연합군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장면을 비춤으로써 관객들이 비판의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지드의 자살은 일차적으로 조르주를 겨냥한 것이지만, 결국 기만을 통해 유지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그의 죽음이 담긴 처참한 롱테이크 숏은 사회적 환부가 생생하게 전시되는 또 하나의 외설적인 장소이다. 조르주는 돌출된 외설적 진실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듯하지만, 결국 그는 그 두려움을 가족 이데올로기로 합리화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하게 그려지는 폭력성은 마지드의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난 뒤 안막커튼을 치고 잠을 청하는 조르주의 마지막 움직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소년 마지드가 고아원으로 붙들려갔던 과거에 대한 꿈을 꾼다. 죄의식은 그의 꿈처럼 일상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 고개를 쳐드는 이 명백한 상처들은 결국 가족, 사회,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힘에 의해 봉합되고 또 다시 은폐될 것이다.
파리대학살이 끔찍한가, 아니면 그것이 20세기 말까지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한가. 하네케의 문제의식은 외설적인 진실 앞에서의 혼란으로부터 점차 그 진실에 직면한 인간의 이기심과 기만의 문제로 옮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리본>은 진실과 이를 은폐하는 억압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에 기생하고 있는 휴머니티에 대한 상세한 고찰이라 볼 수 있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대로, <하얀 리본>은 제 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 즉, 전쟁과 파시즘의 기원을 사유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하얀 리본>이 노출시키는 대상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다. 영화는 폭력을 파생시키는 모든 종류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고 있다. 청교도적 도덕규범, 가족 이데올로기, 계급 구조를 둘러싼 각종 교리와 원칙들은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시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거나 타인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그 폭력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 <하얀 리본>에서 일어나는 방화와 린치의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아이들이 일련의 사건과 관계되어 있음은 강하게 암시된다. 바로 그 점이, 범인이 누구고 동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을 전제로 한 하네케의 이전 영화들과 <하얀 리본>이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히든>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실제로 보낸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히든>의 비디오테이프는 죄책감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상관물로도 보인다. 그러나 <하얀 리본>에서 폭력 사건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아이들이 사건의 범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환기하는 충격과 그 사실에 대한 대응 문제가, 결국 사회 내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히든>에서 어린 조르주는 마지드에게 닭의 목을 치게 하고는 누명을 덮어씌웠다. 성인 조르주는 그 일에 대해 그저 아이들이 하는 작은 거짓말이었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물론 그것은 누구나 저지르는 어린 시절의 작은 실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 때문에 소년 마지드는 고아원에서 ‘증오’를 배워야 했고, 우리는 그가 고아원으로 끌려가는 롱테이크 숏에서 장시간 그의 절망을 지켜보게 된다. 사람들은 간혹 조르주처럼 충격적인 진실로부터 무지와 순수만을 읽어내는 편의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문제는 순수한 아이들이 과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순수한 아이들도 폭력을 저지르게 만드는 현실을, 과연 어른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하얀 리본>의 아이들을 둘러싼 혐의가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진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치명적인 상처들이 봉합과 은폐의 욕구를 작동시키듯이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을 회피하려 든다. 목사는 그가 아이들에게 강요한 청교도적인 도덕률이 아이들의 폭력 앞에서 무력해지는 상황과 마주한다. 그는 책상 위에 살해된 새를 보고 절망하지만 이를 발설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혐의를 두는 학교 선생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그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결국 진실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책임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아이들의 폭력을 인정하는 것은 이들에게 순수를 강요하고 억압했던 기존 도덕 체계의 모순과 어른들이 자행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정하는 대신 분노하고 기만하는 편을 택한다.
<히든>에서 마지드의 아들은 자신을 벌레 보듯 거부하는 조르주에게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조르주를 또 다시 화나게 만든다. 조르주의 분노는 죄책감의 다른 모습이다. 왜 가해자인 그들이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화를 내고 있는가. 왜 명백히 드러난 진실을 감추고 기만하는가. 그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곪아터진 환부를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책임보다는 분노를, 진실보다는 왜곡과 봉합을 택한다. 마지드의 아들이 한 질문은 사실 모든 사적, 정치적 기만의 역사에 가하는 정당한 반문인 것이다.
진실에 대한 위선적인 봉합은 결국 <하얀 리본> 속 아이들의 보복행위처럼 또 다른 폭력행위, 혹은 또 다른 파시즘을 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과잉이 폭력을 낳고, 그것이 다시 억압논리를 부르는 악순환의 흔적을 현실에서 자주 목격한다. 이 암묵적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가려진 상처를 끄집어내어 규범이 낙관하는 세계가 판타지에 불과할 뿐임을 명백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순수함 속에서 억압의 작동을 발견하는 역설의 형태이건 폭력적 도발을 사유하는 반성의 형태이건 간에, 하네케는 또 다시 통제 불능의 괴이한 상황 속으로 인물들을 몰아넣고, 임의로 봉합된 환부에 상처를 내는 식의 외설, 또 다른 퍼니 게임을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2003년 작 <늑대의 시간>은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기차역에 모여들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휴머니티를 사유한 영화다. 물 한 모금조차 마음껏 마시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고 옆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문한다. 좁은 장소에 몸을 누인 사람들 중에는 남편을 살해한 남자와 같은 공간을 견뎌야 하는 주인공을 비롯해, 마실 것을 얻기 위해 몸을 판 여자,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부부, 배척받는 이민자 가족, 그리고 이 와중에 사람들 곁에서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하는 커플까지도 함께 있다. 인간 존재가 어떠한 선의도 행사하기 힘들어진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하루를 함께 견뎌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본능만 남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던 아이가 한밤 중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앞에서 말없이 옷을 벗고 뛰어드는 장면을 담는다. 아이는 소년 마지드처럼, 혹은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처럼 얼굴에 피범벅이 된 채 알몸으로 불 앞에 서 있다. 아이의 멍한 눈과 입가를 흐르는 코피는 인간사회의 가장 슬픈 상처를 경험한 충격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아이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려는 찰나, 다행히 보초를 서던 남자가 아이를 구해낸다. 그는 아이를 달래며, 이 지옥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고, 내일이라도 기다리던 기차가 오면 문을 열어 마음껏 경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는 기차 안에서 바깥의 자연풍광을 찍은 롱테이크 숏을 한참을 보여주고는 끝이 난다.
이 마지막 기차 시퀀스는, 마침내 응급상황이 해결되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아이의 꿈이나 상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질식할 것만 같았던 기차역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안도를 주는 숏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숏으로부터 마냥 희망을 긍정하기란 어렵다. 관객은 흐르는 경치를 지켜보며 지난 두 시간 동안 목격한 인간들의 추한 자취를 반추하게 된다. 눈앞에 흐르고 있는 경치가 삶을 의미한다면, 이 롱테이크 숏이 상기시키는 것은 희망과 낙관 속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삶의 어지러운 단면들일 것이다.
하네케는 관객이 그의 영화를 통해서 삶의 진실을 들여다볼 것을 원했다. 기차역에 모인 인간 군상의 저열한 실상처럼, 삶의 참모습은 때때로 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네케는 그의 전 작품에 걸쳐서 사회적, 정신적 상처의 흔적들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 상처들은 너무나 끔찍해 대개는 은폐되어 온 것들이다. 그러나 하네케는 그 봉합된 상처마저 다시 절개해 진실의 추한 모습을 결국 직시하도록 만든다. 처참한 삶의 진실 앞에서 하네케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오열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이들의 몸부림 속에서 휴머니티에 대한 낙관을 이어가기란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어쩌면 상처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긍정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위험한 기만일 수 있다. 그것이 하네케의 외설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다시금 그의 엄격함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