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버호’가 퇴역함으로써 우주왕복선 시대가 막을 내리는 모양이다. 그동안 미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스페이스 셔틀의 사고확률이 몇 백만분의 1이라고 주장해왔으나, 그것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뿐 실제로 사고확률은 몇 백분의 1이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모두 여섯대의 우주왕복선(엔터프라이즈, 콜롬비아, 챌린저, 디스커버리, 아틀란티스, 앤데버)이 건조되었는데, 그중 두대가 공중에서 폭발한 것은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주왕복선들이 수행한 미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허블 망원경의 설치와 보수일 것이다.
우주에 망원경을 올려놓는다는 발상은 ‘현대 로켓의 아버지들’ 중 하나인 헤르만 오베르트에게서 나왔다. <행성 공간으로 보내는 로켓>(1923)에서 그는 처음으로 로켓의 추진력을 이용해 우주 망원경을 지구 궤도 위에 올려놓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천문학에서 우주 망원경의 역사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학자 라이먼 스피처는 우주 망원경의 이점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그곳에는 공기의 산란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적외선과 자외선이 대기에 흡수되지 않은 채 그대로 관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권 밖에서 본 우주의 모습은 어떨까? 아폴로 프로젝트로 달에 갔다 온 몇몇 우주비행사들이 뒤에 기독교 선교사가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외로이 그 거대한 우주를 혼자 상대하는 기분이란, 아마도 지상에서 할 수 있는 그 어떤 체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한한 세계’라는 중세적 믿음이 무너졌을 때, ‘우주’라는 이름의 무정한 공간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체험을 파스칼은 이렇게 묘사했다. “저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미학에서는 이를 ‘숭고’의 체험이라 부른다.
NASA는 일반인을 위해 허블사이트(http://hubblesite.org)를 운영하고 있다. 거기에 가면 대기권 밖에서 본 우주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행성들, 성운들, 은하들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들은 지구 위에서 보는 그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도 넘어선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숭고’와는 다른 것이다. ‘숭고’는 무한함에 속하나 ‘미’는 어디까지나 유한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진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순간, 우주의 무한함은 유한성 속에 갇히고 만다. 그때 숭고함은 사라지고 그저 아름다움만이 남게 된다.
직경 2m의 안구
사석에서 우연히 천문학과 교수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별 생각없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주로 나가서 허블 망원경에 찍힌 우주의 모습을, 사진이 아니라 육안으로 보고 싶어요.” 그분 왈, 우주에 나간다고 해서 육안으로 허블 망원경에 찍힌 그런 이미지를 볼 수는 없단다. “그건, 가령 우리가 직경 2m짜리 안구를 가졌다고 가정할 때, 그때 우리 눈에 비친 우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안구가 직경 5cm가 넘지 않는 한 그 눈을 달고 우주로 나가봤자 지상에서 보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사진의 아름다움에 취해 내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은, 허블 망원경 사진이 실은 ‘기술적 영상’(techno-bild)이라는 사실이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설사 우리가 직경 2m의 안구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눈에 비친 영상이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기술적 관측을 통해 얻어낸 데이터들,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관측 자료들을,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전환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해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측된 영상이라기보다는 해석된 영상에 가깝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이 인터넷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다. 그 영상이 이제까지 우리가 늘 보아왔던 NASA의 사진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NASA의 사진 속에서 지구는 파란 바다와 푸른 대지 위에 하얀 띠구름을 두른 영롱한 초록별이지만 러시아의 우주겅거장에서 찍은 사진 속의 지구는 불그스름한 색채를 띤 것이 거의 화성처럼 황량하게 보인다. 같은 고도에서 같은 기술로 찍은 사진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데이터를 영상으로 전환할 때 두 나라 과학자들이 각기 다른 미적 해석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지구의 모습에 가까울까? 이는 유인 우주선을 타고 밖으로 나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술적 영상은 그런 확인이 불가능하다. 기계의 시각이 도입되는 것은 결국 육안의 한계 밖의 대상을 찍어야 할 경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본과 사본의 일치를 확인할 객관적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자현미경을 생각해보라. 그것으로 찍은 사진이 과연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해석인지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결국 기술적 영상이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 말하자면 기술-미학적으로 해석된 영상들뿐이다. 흔히 우리는 과학이 제공하는 세계의 상이 자연의 ‘모상’이라 믿으나, 그것들은 그저 ‘모형’일 뿐이다. 모형의 적합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실용성’이다. 그 모형이 자연을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자연의 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일단 적합한 모형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제공되는 기술적 영상들에는 그런 기준조차 필요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각적 적절성, 즉 미학적 아름다움이다.
과학을 미학화하는 경향은 역사가 꽤 오래됐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로 유명한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미생물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종이 위에 스케치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이 현미경을 통해 본 미생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 속의 미생물들은 미학적 해석을 통해 철저히 유미화되어 있다. 그 덕분에 그가 그린 미생물의 아름다움은 뒤에 ‘아르누보’라는 유기적 양식이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미적 해석으로서 자연
헤켈의 경우 ‘현미경 속의 영상’과 ‘종이 위의 영상’ 사이에 그의 손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린 <자연의 형태들>이 실은 그의 주관적 해석을 거쳤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하지만 헤켈의 현미경 그림들은 현대의 기술적 영상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 영상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해석을 거치기 때문이다. 가령 전자현미경 사진은 렌즈를 이용해 ‘확대되는’ 영상이 아니라 분석과 종합을 거쳐 ‘제작되는’ 영상이다. 그 분석과 종합의 기술적 메커니즘 안에는 이미 특정한 해석이 프로그래밍되어 들어가 있다.
허블 망원경 영상은 카메라로 찍은 영상보다는 차라리 텍스트의 영상화, 즉 ‘정보시각화’(data visualization)에 가깝다. 어차피 과학은 오래전부터 감각으로 확인할 수 비(非)직관적 영역으로 옮겨갔다(가령 머릿속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상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 비직관의 영역에 직관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기술적 영상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이 제공해주는 이미지는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차라리 과학자들의 상상의 그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