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친 뒤, 양윤모 영화평론가는 기자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사진 기자만 남은 병실에서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60여일간의 단식으로 앙상해진 알몸을 내보였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임하는 양윤모 평론가의 각오는 이토록 필사적이었다. 궁금했다. 30여년 동안 서울에서 영화라는 학문에만 몰두해왔던 학자가 어떻게 3년 만에 제주도에서 짱돌을 들고 크레인 밑에 뛰어드는 ‘투사’가 되었는지. 평생 주먹 한번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아홉건의 위법 행위로 교도소에 수감된 ‘전과자’가 된 계기는 뭔지. 6월1일 제주지법으로부터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나 제주대학교 병원에 입원한 양윤모 평론가를 만났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단식 투쟁을 계속하고 있어 링거 주사를 맞고 물만 마시고 있어요. 회복 중인데도 생각보다 체중이 잘 안 늘어나네요(65kg이었던 그의 체중은 단식으로 52kg가 되었다). 그래도 의사들이 의외로 몸 상태가 좋다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강정마을에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교도소에서 출소하신 뒤 첫마디가 “강정마을은 평화롭나”였습니다. =석방된 뒤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이 강정마을이에요. 3년간 늘 강정의 바다를 보며 살았는데 57일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다보니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또 제가 없는 동안 해군에 맞서 열심히 싸웠을 강정마을 주민들도 하루빨리 보고 싶었어요. 진짜 큰 싸움을 위해 몸부터 빨리 회복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실 벽에 붙은 사진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마을 사진이라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어요. 사진 속의 은빛 바위 좀 보세요. 제주도는 현무암이 많아서 바위들이 대부분 새까만데 이렇게 은빛이 나는 바위는 강정마을밖에 없어요. 제주도의 올레길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는 7코스가 바로 강정이거든요. 해군은 이런 곳의 돌을 포클레인으로 깨고 그 위에 시멘트를 덮겠다는 거죠.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처사예요.
-단식은 어떻게 시작하신 겁니까. =딱 한 가지 이유에서죠. 해군기지 공사를 철회하고 강정마을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 교도소 밖에 있을 때는 자유로우니 온몸을 던져서 투쟁할 수 있었어요. 어떤 날은 공사현장에서 하루 종일 해군의 방패에 머리를 박은 적도 있고, 어떤 날은 크레인 밑에 드러눕거나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교도소에선 몸이 갇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이 단식뿐이더라고요.
-단식 중 한때 링거 투약을 거부해 위태로운 상황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목숨에 대한 걱정은 초월했어요. 제가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살아남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죽어서 좋은 거름이 되고, 그 거름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산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꼭 나 자신이 살아야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다만 강우일 주교님과의 면담에서 약속한 것처럼 단식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은 머지않아 지키려고 합니다.
-평생 영화평론가로 살아온 분이 4월6일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려는 건설사와 해군에 맞서 싸우다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됐다는 점이 낯설었습니다. 물리적인 투쟁을 피할 수 없었던 까닭이 궁금합니다.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건 마을에 훈련장이 들어오고 사격장이 들어오고 탄약고가 들어온다는 얘기입니다. 나중엔 마을 자체가 없어지게 될 거예요. 역사적으로 군사기지가 들어섰던 마을들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봐오지 않았습니까. 최근 고엽제 문제로 화제가 되고 있는 캠프캐럴처럼 몇 십년 지난 다음에 양심선언해서 문제를 발표하면 이미 늦어요. 그 이전에 환경변화에 민감한 제주도의 바다 생물들이 다 죽을 겁니다. ‘강정’이란 이름이 강 강자에 물가 정자를 써요. 제주도가 물이 굉장히 귀한데 강정마을은 365일 내내 1급수 물이 흐르고 은어 산란지에다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전 지역이에요. 멸종위기종이라는 붉은발말똥게도 이곳에서만 살고요. 그렇게 자연적으로 혜택받은 마을에 해군기지를 세운다는 건 재앙을 불러올 공사를 하는 거예요. 제주도의 환경과 자연의 힘을 빌려 생계를 영위해온 사람들에게도 해군기지 건설은 죽음의 무덤을 파는 겁니다. 이 미래의 재앙을 영화평론가인 제가 침묵한다면 전 평론가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거지요. 평론가니까 말할 수 있어요. 목소리 높이고 크게 행동을 해도 안 들으니 돌을 든 겁니다. 5년 동안 마을 주민분들이 평화롭게 투쟁을 이어왔지만 해군이 군사기지 공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려는 이 시점에선 적극적으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강정마을 5년 투쟁에 폭력으로 구속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제주도청이나 해군쪽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해군기지에 대한 제주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했으며,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이미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공사를 막는 건 불법이라는 입장인데요. =강정 사람들을 두번 죽이는 말입니다. 공탁금은 도청쪽에서 주민들이 원치 않는데도 일방적으로 걸어버린 거예요. 찾아가지 않으면 세금을 때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하고 회유하니 주민들이 남아 있는 재산마저 거덜날까봐 마지못해 스스로 가슴에 송곳을 찌르는 심정으로 (공탁금을) 찾아간 겁니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왜 공사를 막아 업무방해를 하냐고 하는데, 해군이든 우근민 도지사든 행정절차를 정당하게 밟아서 추진한 사안이 하나도 없어요. 그들이 했다는 여론조사도 강정마을 주민들을 대상에서 제외한, 날조된 겁니다. 그래놓고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는 강정 주민들이 집단 이기주의를 부린다고 이간질해요. 국책 사업인데 자기들 이익만 생각한다고. 그렇게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시켰기 때문에 우리가 해군기지 진상조사단을 요구한 겁니다. 이미 야5당(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에서 공동조사단을 만들어 진상을 조사 중이고, 이번 가을에 정기국회가 열리면 국정조사를 통해 그런 비리들을 낱낱이 밝히도록 요구할 겁니다.
-6월8일 단식 중단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하셨다가 갑자기 단식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현재의 도지사(우근민)가 굉장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현재 해군과 중앙정부의 홍보맨 역할을 도맡아하고 있는데,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행정대집행(행정법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를 대신하여 행정 관청이나 제삼자에게 대신하게 하고, 의무자에게 비용을 징수하는 제도)을 할 조짐이 보이더라고요. 이렇게 하면 저희로서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강정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의식있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단식을 연장하기로 한 겁니다.
-선생님의 단식 투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강정마을의 투쟁이 비로소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확실히 군사기지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제주 사람들에게는 4·3항쟁이 굉장히 큰 사건이거든요. 공권력에 의해 고립된 공간에서 3만명이 학살되고 10만명이 부상당한 이때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제주 사람들이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잘 안 가지는 편이에요. 지난 5년간 강정 주민들이 아무리 주변 마을에 하소연하러 다니고 제주도 전역을 일주하고 깃발을 높이 들어올려도 제주도 사람들이 무관심했거든요. 그렇게 고립된 투쟁을 하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자비 들여서 비행기 타고 오고 무전기, 현수막을 지원해주시는 분들도 있고, 메이저 방송 3사의 보도량이 늘어났으니 긍정적이죠. 저는 이 현상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하 SNS)를 통한 일종의 시민혁명처럼 느껴져요. 예전 같았으면 강정 주민들이 4·3항쟁처럼 갇힌 공간에서 고립된 채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겠지만 트위터 등의 SNS가 다른 지역 사람들과의 연대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바람직한 미디어의 역할을 경험했다고 봐요.
-강정마을에 내려오시기 이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강우석필름아카데미 초대교장, 스크린쿼터영화인대책위원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제주도로 완전히 내려오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 2007년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여하며 1년 내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어요. 그때 굉장한 좌절감을 느꼈어요. 특히 실망스러웠던 건 한국의 지식인들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 스펙 쌓는 데 급급했고, 영화계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배타적이었어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지성인인데! 그런 좌절을 겪고 고향에 내려가 몸을 좀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주시 건입동이 제 고향이거든요.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던 지난 30년간은 말만 고향이지 제주도를 그리 자주 찾은 편은 아니었어요. 한시라도 영화 바깥으로 벗어나면 내 전문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긴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만큼 충무로에서 제 청춘을 다 보냈어요. 그런데 평소 그렇게 소홀했던 고향에 내려가니 비로소 1년치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거예요. 투쟁할 때는 몰랐는데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 앉지를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천천히 나를 다스리며 치유하는 과정에서 고향에 눈뜨기 시작한 거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고향의 속살, 오솔길, 가보지 않은 길로 촘촘히 다니면서 고향을 살펴봤어요. 그랬더니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문제가 가장 눈에 띄는 거예요. 서울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던 저는 80년 6월을 거치며 서울만큼 지방도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강정마을 군사기지 사건을 살펴보니 민주적인 절차에 있어서 정말 서울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느꼈어요. 해군들이 강정주민들의 농토와 바다를 강탈하는 과정이 법적, 민주적 절차나 도덕적 정당성에서 정말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강정마을 근처에 중덕사라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며 싸움을 시작한 거죠.
-1년 전엔 주소를 아예 강정마을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주시가 아니라 서귀포 시민이 되었죠. 투쟁하는 목적을 이루면 떠나는 게 아니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마음에 주민등록 주소를 옮겼어요. 해군이나 공무원들이 자신들이 맞서 싸우는 자가 이런 마음과 정신으로 투쟁에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한편이고, 강정 주민들이 제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동질감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한편이었어요. 출소해서 병원으로 오면서 주민분들께 영상 메시지를 남겼어요. 저는 이제 강정 주민입니다. 이 투쟁은 승리할 것이고 투쟁이 끝나더라도 저는 이 마을에 살며 농사짓는 영화학교를 만들 겁니다. 그것이 저의 마지막 과제입니다, 라고.
-‘농사짓는 영화학교’는 어떤 공간이 될까요. =FTA 투쟁에서 좌절한 뒤 많은 반성과 성찰을 했는데 그중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운동권의 중앙중심적인 태도를 반성하는 한편 제가 고향에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뿌리내려야 하는 건 무엇일까. 영화계에 30년 동안 있다보니 미디어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에 볼리비아의 혁명영화에 대한 <혁명영화의 창조>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 책의 번역가로서 지역에 맞는 영화이론과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대안적인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농사짓는 영화학교’란 이름을 떠올린 건 영화는 하나의 농사 행위라고 보고, 농업은 하나의 문화적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에요. 스타 산업이나 자본에 젖은 규모의 문화를 넘어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초등학교 5, 6학년 이상의 아이들을 모아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료로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입니다. 벌써부터 우리 아이를 언제쯤 그 학교에 보낼 수 있냐고 문의가 와요. (웃음) 저는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해결되면 좋은 선생님들을 구해 차근차근 영화학교 설립을 구상해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