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가 없었다면 책상, 의자, 전등, 가구 등은 지금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바우하우스는 현대 산업디자인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초기에 그것은 산업디자인보다는 전통적 공예운동에 가까웠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로 생산된 공산품들의 조악한 외관을 시각공해로 여겼던 윌리엄 모리스는 추악한 기계생산에 새로운 공예의 정신으로 맞서려 했다. 바우하우스 역시 초기에는 윌리엄 모리스의 것처럼 다분히 낭만적 반자본주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표현주의에서 구축주의로
1917년에 시작된 바우하우스 운동의 초기는 표현주의적 시기였다. 자연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이었지만 그 추상적 형태와 색채를 통해 영혼을 표현한다는 정신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작업 방식도 장인이 공방에서 손으로 직접 제품을 만드는 공예에 가까웠다. 1921년 두스뷔르흐는 자신이 창시한 데 스테일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 바이마르를 방문하여, 밤마다 요란한 퍼포먼스를 벌여 바우하우스를 신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모두 낭만주의자야.”
1923년 헝가리 디자이너 모호이-나지가 합류하면서 바우하우스의 방향은 급격히 바뀐다. 초기 바우하우스의 모습을 결정했던 마이스터 이텐은 동방의 사상을 신봉하며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반대하는 신비주의자였다. 반면 그의 뒤를 이은 모호이-나지는 유물론적 미학을 신봉하는 구축주의자였다. 두 사람의 기질의 차이는 그들이 입고 다니던 복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이텐이 마치 라즈니쉬처럼 수도복을 입고 다녔다면 모호이-나지는 말끔한 엔지니어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모호이-나지는 기계를 거부하는 낭만적 반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유물론적 미학에 깊이 공감했던 그는 외려 기계야말로 미래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20세기의 현실은 기술, 즉 기계의 발명과 구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지이다. 기계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20세기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기계는 구시대의 초월적 정신주의를 대체한다.” 모호이-나지에 따르면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기계를 거부할 게 아니라 기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텐이 떠난 뒤에도 바우하우스에는 여전히 두개의 흐름이 공존했다. 하나는 모호이-나지가 주도하는 구축주의적 기계미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클레와 칸딘스키가 주도하는 표현주의적 생명미학이었다. 두 흐름의 대립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클레와 칸딘스키도 이 시기에는 합리적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들의 주관적 미감을 과학적으로 객관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 클레의 화면은 자연적 모티브가 거의 사라져 순수추상에 가까워지고, 칸딘스키의 화면은 과거의 표현적 추상에서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한다.
학교장인 그로피우스는 순수예술과 실용예술, 예술가와 기술자의 통합을 원했다. 하지만 공예와 예술의 통합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어서, 학교 내에서 순수예술이냐 응용예술이냐를 놓고 늘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이텐이 학교를 떠난 것도 결국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문제에서 구축주의자들은 예술은 실용적 대상이 되어 대중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이라 이해했다.
이 두 흐름은 비교적 사이좋게 공존했지만 때로는 둘 사이에 가벼운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모호이-나지는 늘 예술을 정신이나 영혼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강조하고 다녔다. “설마 아직도 영혼이라는 아이들의 동화 같은 얘기를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신이란 육체의 기능에 불과해요.” 이 노골적인 기계미학이 클레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클레는 예술이 자연물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다고 강조하며 종종 기계의 한계를 강조하곤 했다. “기계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
유사생명적 형상
디자인이 생명을 원형으로 삼을 경우 유기적 양식이 얻어진다. 반면 디자인이 기계를 원형으로 삼을 경우 무기적 양식이 탄생할 것이다. 전자는 따뜻한 느낌을 주나 어딘지 시대착오적이고, 후자는 현대적이나 차갑고 무정한 느낌을 준다. 양자를 적당히 절충한 것이 바로 파리 지하철 입구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아르누보’ 양식이다. 물론 클레나 칸딘스키의 이미지는 아르누보가 아니라 현대적 추상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미지에는 아직 자연과 인간 혹은 생명의 온기가 남아 있다.
클레에 따르면 현대 회화의 임무는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에 있다. 클레에게 가시화해야 할 그 ‘비가시적인 것’이란 바로 잠재성의 세계다. 가령 주사위를 던지면 실현되는 것은 하나의 눈이지만 거기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다섯개의 가능성이 있다. 그처럼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는 그저 하나의 가능세계일 뿐 다른 수많은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바로 그 가능세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클레에게 창작은 일종의 ‘창세기’였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주로 기하학적 추상을 그렸다. 그 차가움 속에서도 그의 추상에 생기가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아직 인간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칸딘스키에게 추상은 여전히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칸딘스키가 말년에 그렸던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바닷속을 부유하는 해양생물 혹은 양수 속을 떠다니는 태아를 연상시키는 유사생명적(bio-morphic) 형상들이 나타난다. 형태와 색채는 여전히 추상적이나 유연한 곡선이 만들어내는 뚜렷한 윤곽은 분명히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모호이-나지는 구축주의의 신념에 따라 형태는 자연(생명)이 아니라 물질(재료)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강철과 유리 같은 현대의 재료들은 당연히 무기적 형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죽음’의 형식이다. 반면 클레와 칸딘스키에게는 추상적이고 무기적인 형태마저도 여전히 인간과 자연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의 형식이다. 모호이-나지의 ‘과학’과 클레-칸딘스키의 ‘예술’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당시에 기계는 기술에 속하는 반면, 생명은 아직 기술에 속할 수 없었다.
두 흐름의 통합은 오늘날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얼마 전부터 과학을 주도하는 패러다임은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생물학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유전자공학과 분자생물학은 현대를 이른바 후기-생물학적 상황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생명은 엔지니어링의 대상이 됐다. 가령 인공생명연구와 인공생명예술은 철저한 합리주의에 따라 생명의 현상과 진화의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며, 아직 지구 위에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생명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유전자를 조작해서 키메라를 만드는 것도 어느새 과거의 일이 됐다. 생물학도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분석적 단계를 넘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유전자를 창조하는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부품을 조립하여 기계를 만들듯이, 마치 분자를 조립하여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기계적 조립을 통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로써 모호이-나지와 클레-칸딘스키 사이의 대립은 해소된다. 칸딘스키 말년의 유사생명적 형상은 이 새로운 시대의 시각적 상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