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 골딘의 유명한 ‘셀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왼쪽 1번 사진은 골딘과 남자친구 브라이언이 침대 위에서 다소 차갑게 있는 사진이네요. 2번 사진은 둘이 사랑을 하고 있는 사진이고요. 3번 사진은 일년 뒤의 사진인데, 브라이언에게 폭행을 당한 뒤의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한장씩 떼어놓고 보면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세장을 모아놓고 보니 무언가 ‘지독한 관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봤을 때 제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왜 낸 골딘은 굳이 이 사진을 찍었을까? 그리고 굳이 왜 타인에게 보여줄까.”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진들을 통해 무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봅니다.
다른 작가들의 ‘셀카’를 몇장 더 봅시다. 신디 셔먼의 사진입니다. 4번 사진은 신디 셔먼의 평상시 모습인데 아주 미인이네요. 5번은 그녀의 또 다른 사진인데요. 아주 오싹할 정도로 기괴하게 연출을 했네요. 다음 6번은 앤디 워홀의 셀카입니다. 늘 하던 대로 팝 아트적인 면모가 두드러진 자기 연출이죠. 이렇게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화상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작업의 의미는 각자의 고민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은 이제 더이상 작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지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자신의 셀카 몇장쯤은 있을 테니까요.
비디오 다이어리 혹은 자전적 다큐멘터리
포토그래퍼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 셀프 포트레이트 작업을 시도한다면 영화감독들은 비디오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1990년대 말부터 ‘무게가 가벼운’ 디지털 캠코더가 보급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여주려는 모험들이 늘어났는데요. 이것을 성격에 따라 비디오 다이어리 혹은 자전적 다큐멘터리라 부릅니다. 스마트폰 등으로 자신의 셀카나 비디오를 찍는 것이 일상화된 ‘디지털 세대’에게는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전에 캠코더가 무겁고 비쌌던 시절에는 감히 캠코더로 자신을 찍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비디오 카메라가 비싸서 개인이 소장하기 쉽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서 한손에 들고 ‘셀카’를 찍다가 팔이 부러질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비디오 다이어리는 이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냥 막 찍는 것이 아니라 혹은 블로그의 셀카처럼 얼짱 각도의 예쁜 모습만 연출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찍을까의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골딘, 셔먼, 워홀의 자화상 사진들도 예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다 다른 질문을 통해서 탄생한 작업들이죠.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찍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소재와 스타일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셀프 포트레이트 포토와 비디오 다이어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찍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얼짱 각도로 예쁘게만 나를 찍어대는 셀프 사진/동영상과 ‘비디오 다이어리’ 혹은 ‘자전적 다큐멘터리’가 갈리는 것이죠.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잠깐 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올해로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를 연출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폭력’에 대한 ‘커다란’ 정치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2001)와 <그들만의 월드컵>(2002)이란 제목의 영화들이었는데요. 그러다가 문득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한데, 나는 얼마나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아마 잘 못 살았나 봅니다). 그럴 때 만났던 것들이 서두에서 얘기한 골딘이나 셔먼, 워홀 등의 작가들의 자기 초상들에 대한 작업이었는데요.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커다란 이야기도, 정치적인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작품들이 ‘일종의 멜로’영화 <히치하이킹>(2004)과 사랑에 대한 ‘비디오 다이어리’ <에로틱 번뇌보이>(2005)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계속 사회 현실에 대한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이들 이상으로 ‘정치적인 이야기’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야기’인 ‘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디오 다이어리를 작업하는 사람들의 유명한 구호마냥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지요.
대런 슈타인 감독의 <Put the Camera on Me>(2003)라는 자전적 다큐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감독은 소년 시절 아버지가 사준 가정용 ‘아날로그’ 비디오 카메라를 갖고 자신이 동네 친구들이랑 노는 모습을 찍은 테이프를 찾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감독이 당시 자신과 친구들이 나오는 ‘아날로그 화면’을 현재 시점에서 보면서 ‘디지털’ 캠코더로 어린 시절에 대해 코멘터리하는 모습을 촬영해서 편집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아날로그 화면과 어른이 된 친구들의 디지털 화면이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요. 비디오 카메라가 더이상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닌 ‘장난감’으로서 기능하는 현실을 잘 반영해주기도 하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한 매체 환경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관찰을 할 수 있게 해주며, 아이들이 스스로 찍은 장난스러운 화면을 통해서 그들 세계의 삼각관계나 권력관계 등이 ‘자연스럽게’ 보여지기도 합니다. 여기엔 타인이 ‘겨누는’ 카메라에는 도저히 담길 수 없는 풍경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목처럼 ‘나를 찍어라’의 시대에만 가능한 독특한 영화적 경험이지요.
앞으로 몇주간 여러 편의 자전적 다큐멘터리와 비디오 다이어리들을 탐색해나가며 그것을 완성해나가는 과정들을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일기장에 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카메라로 일기를 쓰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고, 나아가서 ‘나’를 찍는 것이 혁명을 촬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는 작업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하기에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를 통해서 자신을 찍는 작업에 독자들이 도전해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최근에 칸영화제에서 상영한 김기덕 감독님의 <아리랑> 역시 이러한 고민과 맥락의 비디오 다이어리 작품이지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1막 4장 227행에서 리어왕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바로 이 리어왕의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