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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안나 윈투어에겐 없는 것

언젠가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안나윈투어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를 보려다가 20여분 만에 포기했다. 초반 몇분 동안의 감상으로만 보아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확고히 얻기 위해 상대에게 칼을 휘두르는 냉혹한 승부사였는데 그런 그녀를 절대화하는 영화 분위기가 좀 역겨웠다. 그리고 얼마 뒤, 우연히 보게 된 미국 드라마에서 좀 이상한 편집장 한명을 알게 됐다. <HBO>가 제작한 미국 드라마 <보어드 투 데스>의 조역, 조지. 테드 댄슨이라는 코미디 배우가 연기하는 이 인물은 밤마다 마리화나에 취해 있고 젊은 여자들의 꽁무니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 돈 쓰기를 물 쓰듯 하는데다 괴상한 나르시시즘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에 있어서 승부수를 던지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도 재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에게서는 안나 윈투어와는 완전히 반대된 무언가가 있다. 드라마 속 조지의 친구들인 조나단과 레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도 자신보다 무능하고 한심하며 나이도 한참 어린 이 헐렁이들과 격없이 어울려 노는 것이 이 거대 잡지사 편집장인 조지의 유일한 낙이다. 그리고 대개 조지가 매력을 풍기는 때가 바로 그 헐렁이들을 기어코 따라붙어 그들의 엉터리 모험에 동참하는 순간들이다. 조지의 부하 직원이자 작가인 조나단은 아르바이트로 탐정일을 하는데, 조지는 그에게 늘 무슨 모험을 할 것이냐고 묻고 끼워달라고 하며 그럴 때 가장 적극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때마다 조지는 인간적인 자기 모순성을 자주 드러낸다.

훗날 오진으로 확인됐지만, 암 선고를 받은 순간 조지는 의사에게 무심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을 수 없어요…. 아직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인생에서 알아낸 게 없다는 말일 것이다. 조지는 뛰어난 확신과 결정의 인간형이 아니라 어설픈 발견과 모험의 인간형이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추구하는 한 어쩔 수 없이 그의 인간적 모순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안나 윈투어에게는 없고 조지에게는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순을 줄이고 확고한 승리를 쟁취하려는 인간형과 무슨 수를 써보아도 찾아오는 모순을 막을 수 없기에 그걸 요령있게 즐길 줄 아는 인간형. 둘 다 다른 이유로 우리를 피곤하게는 하겠지만, 그래도 한쪽을 꼽자니 역시나 후자가 나의 취향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같이 어울려 놀기에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