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시절, 교수님이 조언하셨다. “연봉이 얼마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4대보험이야.” 운 좋게 4대보험 가입자로 살고 있지만, 지금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솔직히 매달 급여명세서에서 사라진 각종 보험료를 보면 가슴이 쓰리다. 하지만 월급쟁이도 아니고, 잔금은 언제 받을지도 모르고, 툭하면 일자리가 사라지는데다, 사고를 당하는 일도 잦은 영화스탭들에게 4대보험 가입은 절실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지난 5월24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놓고 영화산업노조, 제작가협회, 영화진흥위원회가 강조하는 것도 4대보험의 적용이다. 아직은 권고사항에 지나지 않지만, 이 계약서가 적용된다면 영화스탭들도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게 된다.
물론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만큼 4대보험료를 빼고난 나머지 임금, 흔히 말하듯 ‘세후 임금’이 얼마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모든 스탭들의 임금은 갑인 제작자와 을인 스탭이 상호협의하에 정하겠지만, 표준근로계약서는 4대보험 가입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의 ‘계약금’이란 표기 대신 ‘임금’이란 단어를 적용했고, 월 기본급여, 초과근무수당의 금액, 지급기준, 지급일시, 지급계좌 등을 명기하도록 했다. 기존의 ‘계약금’이나 ‘잔금’식의 도급형 보수구조에서는 고용노동부로서도 영화스탭의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과근무의 경우에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1주간 40시간)을 원칙으로 하되 당사자간 합의하에 1주간의 연장근로 한도인 12시간을 초과할 수 있도록 했다. 영진위쪽은 “임금의 직접적인 상승을 연동시키지 않음으로써 표준근로계약서의 우선 정착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매월 약정된 회차(또는 근로일) 초과시에는 초과근무수당의 지급요건을 마련함으로써 당사자간에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근로계약서 연구에 참여한 영화산업노동조합의 홍태화 조직국장은 “근무시간 연장에 따른 수당지급 등 여러 이슈가 있었지만, 정기적인 임금과 4대보험을 적용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영화제작가협회의 이승태 사무차장은 “현재는 제작사도 투자배급사에 비하면 약자인 상황이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최대한 만들 수 있는 안전망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는 표준근로계약서가 얼마나 넓은 범위로 확대적용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될 전망이다. 영진위는 우선 영진위가 지원하는 영화들을 적용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2011년 영화진흥사업 계획에 따르면 영진위는 순제작비 4억∼20억원의 저예산영화 중 올해 촬영에 들어간 작품을 대상으로 43억원을 투입해 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 감독급 스탭을 뺀 나머지 스탭의 인건비에 대해 편당 최고 6750만원을 보조하기로 했다. 연간 제작편수로 따질 때, 꽤 큰 비중을 차지할 듯 보인다. 또한 현재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약관 심사 중인 표준투자계약서의 심사가 끝나면 표준근로계약서의 심사도 청구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의지다. CJ E&M 영화사업본부의 관계자는 “현재 유관부서에서 논의 중”이라며 “스탭들의 기본적인 처우에 대해서 심도 깊게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준근로계약서의 장밋빛 미래는 영화스탭들도 매달 사라지는 보험료를 안타까워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럴 정도로 안정된 고용시스템과 임금체계가 정착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