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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06-03

비(非)독서의 미덕

가장 진지한 독서는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선 따로 도모할 일이 없기에, 번잡한 관심에서 해방되어 완벽한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실에 들고 갈 책을 선정할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서가에서 책 고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압력도 증가하지만 그렇게 증가한 압력은 뒤에 증가된 쾌감으로 돌아오기에, 인내에 따르는 그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궁극적 해결과 더불어 도래할 지고의 열락에 대한 벅찬 기대가 존재한다.

책을 읽지 않는 법

그렇게 엄선한 책이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변기 위에서 이 책은 육체와 정신, 이중의 해방을 의미했다. 글 써서 먹고살다보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쏟아질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소심한 먹물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그들의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읽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을 책의 각주를, 가능한 한 원어로 달아가며, 본의 아니게 위선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바야르는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를 인용한다. 350만권의 장서를 가진 황실도서관의 사서는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알 수 있는지 궁금하지요? (…) 그것은 바로 어떤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바야르는 이렇게 코멘트한다. “그가 신중한 태도로 책 주변에만 머무는 것은 오히려 책들을- 모든 책을- 사랑해서요, 그 책들 중 어느 한 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할까 두려워서인 것이다.”

“모든 책”에 대한 이 사랑,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이 두려움이 어디 그만의 것이겠는가? 불가피하기에 일상화된 이 비독서의 미덕을, 바야르 이전에는 그 누구도 감히 변호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모든 책”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책을 대충 훑어본 경우’, ‘다른 사람 얘기를 귀동냥하는 경우’, 그리고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다.

저자로서 나 역시 비독서의 미덕을 강조하며, 늘 “독서 문화의 요체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사는’ 데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바야르는 비독서가 가진 정신적 미덕을 간파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미덕의 바탕에 깔린 물질적 조건에 대한 통찰에 이르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라. 비독서가 아니라면 즉 사람들이 꼭 읽을 책만 산다면 도서시장의 규모는 1/10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이는 도서문화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이 인식은 다음과 같은 독자 분류법으로 이어졌다: ‘영도(零度)의 독자’, 즉 내 책을 사서 읽는 독자다. 이들은 도서문화에 나름 중요한 기여를 한다. 이어서 ‘+1도의 독자’, 즉 내 책을 사서 읽지 않는 독자들인데, 나는 사사로움을 구하지 않는 이들의 고결함을 높이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2도의 독자’, 즉 내 책을 산 것을 잊어버리고 또 사는 이들은 “모든 새로움은 망각의 결과”라는 드높은 철학적 통찰로 인해 나의 각별한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도서문화의 진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이너스 등급의 독자들도 있다. ‘-1도의 독자’, 즉 내 책을 남에게 빌려보는 독자. 그리고 ‘-2도의 독자’, 이들은 사회에 무익한 존재들로, 빌려 읽은 주제에 내 책에 악담을 늘어놓는 자들이다. 그저 독자들에게 비독서의 미덕을 권하는 데에 그친다면 그 역시 위선일 것이기에 나 역시 평소에 비독서를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왔다. 비독서를 통해 논문을 써서 심지어 학회에 발표한 적도 있다.

5년 전 어느 학회에 참가해야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이라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대학의 은사께서 부탁하신 일이라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요청 받은 주제는 ‘근대철학에 나타난 죽음의 관념’. 근대철학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그 배경이 된 중세를 훑어야 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수년 전에 책을 쓴 적이 있기에, 일단 기억을 더듬어 중세 초기의 ‘영육일원론’이 중세 후기의 ‘영육이원론’으로 변하는 과정을 스케치했다.

책 안 읽고 논문 쓰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합리주의 철학의 ‘죽음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 일단 ‘데카르트-되기’를 실행하기로 했다. <방법서설>의 저자로서 나는 그동안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주장해왔다. 육체는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실체’이기에 무한히 쪼갤 수 있고, 따라서 가멸적이다. 반면 정신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사유실체’이기에 쪼갤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불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추론하에 일단 데카르트가 영혼불멸을 주장했다고 써넣었다.

다음은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이번에 나는 머릿속에 흄의 영혼을 모셨다. 나는 모든 지식의 근원이 경험에 있다고 믿으나, 나의 죽음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나의 ‘의식’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달리 타고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감각적 인상들의 어지러운 연합, 플럭스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이라는 얘기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된 헛소리일 뿐이다.

이어서 나는 칸트가 되어 데카르트와 흄의 생각을 종합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인식이 가능한 영역과 불가능한 영역을 명확히 구별하자고 주장해왔다. 내가 보기에 ‘영혼’이라는 주제는 인식 가능한 대상의 영역 밖에 있다. 하지만 거기서 곧 영혼이 없다는 주장이 나오지는 않는다. ‘정의’가 가능하려면 가령 생전에 호사를 누리다가 죽은 악인에게 정의가 행사되려면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 즉 영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겔 귀신이 오셨다. 내가 말하는 ‘절대정신’이란 개개인이 가진 주관적 정신이 아니다.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에서 개개인이 가진 주관정신은 법률이나 윤리와 같은 객관정신과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는 가운데 ‘지양’되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절대정신이지, 개개인의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죽음은 아무런 위안 없는, 내세의 기약이 없는 ‘단순한 죽음’일 뿐이다. 이런 것을 ‘연역적 글쓰기’라 불러야 할까?

문제는 이를 근거 짓는 것. 물론 그것을 위해 데카르트의 논문들, 흄의 에세이들, 칸트의 3부작,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 뒤질 필요는 없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철학사 책을 대충 훑어가며 일단 내 추론이 맞는지 확인했다. 신을 제대로 모셨는지 대부분 내가 추측한 대로였다. 남은 것은 글을 뒷받침할 인용문을 찾는 것. 그것은 철학사 책의 각주를 추적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재인용이지만 각주를 붙이고 나니 제법 그럴듯했다.

제목에는 호라티우스의 유명한 시구를 사용했다. “나의 모든 것이 죽는 것은 아니다.”(Non omnia moriar) 이 제목은 논문의 주제와 맞아떨어지는데다가, 부가로 내가 라틴어까지 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장점이 있었다. 논문은 두곳의 학회에서 발표됐고, 내용이 꽤 괜찮았던지 학회지에 게재 요청까지 받았다. 그 요청을 나는 거절하고 말았는데, 매수를 늘리거나 형식을 맞춰달라는 요구보다 내 정신을 괴롭힌 것은,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학회지의 관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