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어떤 인간들은 이 문구를 등에 업고 “호모포비아도 하나의 취향이니 받아들이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렇게 막 던지는 분위기에 숟가락 하나 얹어보자면 내가 존중받고 싶은 취향은 ‘로맨스포비아’다. 스무살 이후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남녀상열지사가 주제인 작품을 자발적으로 본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요, 극장에서 러브신이 나오면 일단 잠든다. 두어해 전 그 이유를 진지하게 5분가량 고찰해본 바, 나에게 로맨스는 ‘드라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건 말건 그 신은 스토리의 정체지 진행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로맨스란 물건도 쓸모있는 곳이 꼭 하나 있으니 바로 ‘웃기는’ 용도다. 사실 다 큰 어른들에게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빼앗고 온갖 어처구니없는 짓을 다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코미디와 종이 한장 차이다. 당사자들이 그 희극적 요소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서 종종 비극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망할 바엔 평범한 소개팅보다 괴이한 소개팅이 낫다’는 지론을 갖거나 장문의 컬러메일로 이별을 통보한 남자친구의 문학적 감수성을 재평가하는 것은 인생의 무수한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주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로맨스가 새드 엔딩을 향해 치닫는 이별의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은 이수일과 심순애인데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잘도 흘러가고 산다는 건 필연적으로 궁상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낱낱이 끄집어내 현미경으로 친절히 확대까지 해서 보여주는 게 요즘 KBS <개그콘서트> ‘생활의 발견’ 코너다.
처음 두 연인의 만남의 장소는 삼겹살집이었다. 여자(신보라)를 불러낸 남자(송준근)는 “장소가 중요해?”라고 되물었지만 원래 삼겹살집이란 촌스러운 빨강 앞치마를 둘러야 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주섬주섬 물수건과 수저를 주고받아야 하는 곳이다. 힘든 이별의 말이 오갈 때 눈치없는 주인 남자(김기리)가 고기를 자꾸 뒤집어대며 분위기를 깨뜨리면 남자는 “나, 딴 여자 생겼어”라며 깻잎 물기를 탁탁 털어대고 여자는 “난 오빨 진심으로… (주방을 향해) 냉면 자르지 마세요- (사이) 사랑했어”라고 토로한다. 파랑 앞치마를 주는 감자탕집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떠나려는 여자친구를 붙드는 것보다 흘러넘치는 사이다를 받아 마시는 동작이 다급하고, 애절한 와중에도 입은 쯥쯥대며 뼈다귀를 빨아대느라 바쁘다. 이삿짐을 싸다가 예전에 선물받은 곰인형을 도로 가져가라고 집어던지면 방정맞은 “알러뷰~알러뷰~”가 울려퍼지는 것도 뜨악하지만 “나 그 여자랑 지방 내려가서…”의 뒷말이 “아응으에여오애(다음주에 결혼해)”인 이유는 입에 가득 문 자장면 때문이다.
심지어 각종 음식점을 전전하던 이 커플이 미용실에서 헤어지던 날, 남자친구의 어젯밤 행적을 추궁하던 여자가 우주선 의자처럼 생긴 파마 기계에 앉아 찰칵 셀카를 찍고, 변명을 늘어놓던 남자가 미용사를 향해 “구레나룻은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남자가 “너 내 얘기 똑바로 들어!”라고 엄포를 놓자마자 웅웅대며 목소리를 묻어버리던 헤어드라이어는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예전 남자친구와 사귀기로 결정한 건 대학가의 24시간 커피숍이었는데 바로 뒤 주방에서 빙수용 얼음 가는 기계가 미친 듯 시끄럽게 돌아가며 나름 로맨틱하다면 할 순간을 쉬지 않고 방해했다. 그 순간에도 속으로 ‘아, 이거 대박 웃긴데!’라고 생각했던 답없는 여자가 다름 아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