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오월愛>는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참가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내려 한다. 이런 시도는 오늘날 환영받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80년 광주에 대해서는 일종의 피로감 같은 것이 있다. 한번도 제대로 평가받진 못했지만 가해자나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모두 잊고 싶어 하는 역사가 되었다. 광주사태라 불리던 것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는 형식적 복권을 이뤄냈어도 그때의 정치적 지형과 다름없는 현재에서 사람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여전히 이 편 저 편으로 나뉜다. 가해자쪽이었던 정당이 지금도 한국사회의 여당이고 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기억하고 있는 현실에서 형식적 명명 작업이 가리고 있는 상처의 진액은 더욱 농도가 높아졌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 상당수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죄책감을 품고 있으나 그걸 다시 기억하는 일은 망설여진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필자는 그랬다. 선과 악의 이분법, 정의를 생각하는 명분을 품고 살기에는 현실의 일상적 삶에서 너무 많은 탈색이 생겼고 그저 기성 질서에서 탈락하지 않기에 급급하다. <오월愛>를 보기 전에 왠지 망설여지는 기분의 정체는, 젊은 시절의 죄책감을 충분히 씻어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현실을 방기하는 또 다른 죄책감이 있는 데다 그걸 어쩌지 못하는 무력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월愛>를 보면서 조금씩 눈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이 역사적 사건은 외면할 수도, 완전히 묻어둘 수도 없는 것이란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조용히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그들
감독 김태일은 수많은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인터뷰한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시장에서 좌판 행상을 하는 할머니를 비롯해 시골의 이름 없는 촌부, 버스기사, 꽃집 아저씨, 고위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 모두 마음속 깊이 자부심을 품고 있지만 그 자부심보다 더 강한 것은 후회다. 심지어 어떤 이는 당시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에 참가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뉘우친다. 아주 짧았던 민중의 해방구, 정의를 위해 일어섰다는 명분으로 계급과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완벽한 공동체를 이뤘던 농밀한 삶의 기적을 체험한 것을 뒤로하고 그들은 평생 주홍글씨를 지우지 못하고 살았으며 오늘날에도 그건 여전하다. 고문하고 투옥했던 정부는 포상을 하고 보상금을 주는 또 다른 정부로 바뀌었으나 상황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4·19 혁명과 같은 위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많은 희생에 반비례해 실패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은 이와 그에 동의한 한국사회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 와중에 돈이 들어왔다. <오월愛>의 중반 부분에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진 않으나, 광주 금남로에 있던 전남도청 별관을 옮기는 문제를 두고 대립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적나라한 싸움이 나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적이 분명했던 시절은 가고 한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온다. 기억하기 위한 장소의 보존은 중요한 문제지만 그들은 이걸 두고 다른 명분을 갖고 싸운다.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게 돈을 둘러싼 이전투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도 현재형의 진행되는 상처의 일부다. <오월愛>의 장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당사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상처 그 자체로 드러내고 거기에 어떤 판단도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기억해야 하는 우리의 윤리적 당위를 일깨운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태일의 연출자로서의 선택에 큰 불만은 없다. 그는 선량한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시간의 흐름에 맞서 자연스럽게 싸운다. 기억을 위한 그의 영화적 싸움은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때로 움직인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광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 영화 스탭들을 마뜩잖게 여기는 할머니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 한번도 발설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을 조금씩 꺼내놓는다.
<오월愛>의 본령은 바로 거기 있다. 영화에 나오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길 두려워한다. 아직도 막을 치고 보는 세상의 여론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내기 싫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주변 가족들조차 정확히 당사자가 무슨 상처를 안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름 없는 참가자들은 5·18 관련 단체에 속해 연대감을 갖고 헤쳐나가지 않는 경우 대개는 절대적인 고독을 견디는 방법을 택했다. <오월愛>에서 가장 경이적인 부분은 그것이다. 운동단체에 속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삶에서 조용히 세월을 견디며 살았던 그들의 믿을 수 없는 낙천성과 인내심이 이 다큐멘터리 화면에 자연스레 배어난다. 앞서 언급한 시장 좌판 할머니는 여전히 현실에선 가난하고 별다른 생활의 질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강인하게 현실을 버티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프로파간다 냄새가 나지 않는
김태일은 원래 이 영화를 찍기 전에 세계민중사를 기획하고 있었으며 해외 답사까지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세계민중사를 찍기 전에 광주를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찍었다고 하는 <오월愛>를 통해 김태일 그 자신이 튼튼한 민중적 낙관주의를 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느낌이지만 이게 꼭 틀린 것은 아니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를 먼발치서 보고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이 영화 개봉을 앞두고 우연찮게 마련된 대면 기회에서 그는 자신이 사는 법, 자신의 가족과 사는 법을 슬쩍 내게 눈치채게 해주었는데, 자신의 욕망에 매달리는 우리 대다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오래전에 체화한 것 같아 놀라웠다. 소리 높여 싸우는 대신 그는 자신의 일상 삶에서 많이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맘을 터놓고 살며 즐기는 방법에 관해 나름의 지혜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을 낳게 해주었을 것이다.
<오월愛>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대다수 다큐멘터리와 다른 논리와 감성을 갖고 있다. 선악이나 명분을 갖고 접근하지 않아 당연한 결과로 프로파간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특정인을 축으로 밀고 나가지 않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처를 개별적으로 다룬다. 집단을 다루되 개별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상업적이거나 대중적 호소력에 의지했다면 그는 이 영화를 특히 기운이 센 몇몇 인물에 기대어 다큐멘터리 서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좌파들도 우파들보다 더 세련되게 신파적 감성과 영웅주의를 내세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감독의 인품이고 예술적 감성이다. 윤리가 형식을 다스리면서 김태일 그 자신의 그릇에 맞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愛>는 보는 사람을 눈물 흘리게 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 외에 실제 삶의 질의 형태를 바꾸는 점에선 완벽하게 실패한 이른바 486세대의 업보는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어떤 질적 인식의 전환을 한국사회에 가져오지 못했다. 엘리트들의 실책이 가져온 모든 무화의 결과가 과거와 다름없이 오늘을 사는 광주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다. 그들이 아주 힘겹게 과거의 기억을 꺼낼 때 울화가 들어 죽을 것 같은 상태에서도 견디며 산 그 시간의 무게가 보는 사람을 힘든 고통에 빠트린다. 1980년 당시 고립됐던 광주와 마찬가지로 현재까지도 우리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정의에의 명분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살아남음으로써 가져야 했던 상처에 대해 막을 치고 고립시킴으로써 우리 삶의 장벽을 거대하게 치고 있었다는 자명한 현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역사적 불의에 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라고 속편하게 말할 순 있지만 기억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오월愛>는 그 기억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태도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이, 곧 이웃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나누는 사람이라는 걸 관객에게 느끼게 한다. 내가 보기에는 김태일이라는 감독이 그런 사람이다. 이런 감독이 새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