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일하는 미국인 영화제작자 프로코쉬. 카프리에 있는 그의 ‘별장’에 대한 언급은 영화의 초기에서 이미 이루어진다. 그리고 점차로 언급의 빈도가 높아진다. 마치 또 다른 주인공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 같은 긴장감과 함께.
결국 그 ‘별장’이 나타나는 것은 1시간43분35초짜리 영화에서 무려 1시간22분40초가 지난 순간이다. 그것도 프로코쉬의 의뢰로 영화 <오디세이>를 찍고 있는 감독 프리츠 랑(자기 자신을 연기)과 랑의 작업을 ‘개선’하기 위해 프로코쉬가 불러들인 시나리오작가 폴이 천천히 비탈진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다소 지루하게 전개된 다음에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까지 나폴리 앞바다 카프리 섬의 절경 위에 세워진 이 작은 집을 거의 벗어나는 일 없이 전개된다. 이 집은 <경멸>의 종착역인 셈이다.
말라파르테 주택의 건축가는 이탈리아 합리주의 계열의 아달베르토 리베라. 하지만 그는 이 집의 초기 스케치만 제공했고, 집주인 말라파르테는 결국 이 지역의 석공과 함께 자기 마음대로 집을 완성했다. 그리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푸른 바다와 기암절벽, 바다를 오가는 배들의 돛과 이 지역 건물들의 계단 등이 이 작은 집의 모티브가 되었다. 즉 그는 어디 다른 곳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지 않고 순전히 바로 그 장소가 갖고 있는 단서들만 모아서 세상에 둘도 없는 집을 만들어냈다. 외교관이면서 작가인 쿠르지오 말라파르테가 건축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경멸>은 유럽적인 영화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과 장소의 역사가 누적되고 서로 관통하며 마치 양파처럼 이야기들이 중첩되는 세계가 이 영화 안에 있다. 예를 들어 프리츠 랑은 독일인들이 트로이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영화 속의 영화를 감독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독일인이고 본명이 쿠르트 에리히 주케르트였던 말라파르테의 태생적 배경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구대륙 유럽 특유의 층층이 짜인 자기들만의 지적 유희의 세계가 유난히 선명한 지중해적 원색의 향연 속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