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며칠 전 회사 앞 낙지 집에서였다. 숟가락으로 막 계란찜을 뜨던 중 건너편 벽에 걸린 TV 속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앞에 마주앉은 여자가 우리의 ‘새와’(박정아)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말했다. “임신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5초 뒤, 의사가 새와에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12주입니다.”
만약 몇주만 더 일찍 KBS <웃어라 동해야>에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면 새와와 남편 도진(이장우)의 부부싸움 및 화해 날짜를 기준삼아 개월 수까지 맞힐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사무쳤지만 실은 이 드라마에 흥미를 느낀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말로만 듣던 동해(지창욱)가 <너는 내 운명>의 ‘새벽씨’ 윤아나 <열아홉 순정>의 ‘량국화’ 구혜선 같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를 닮은 미남이라는 것과 도지원이 높낮이 없는 억양으로 그리도 부르짖던 “세화야…”가 “새와야…”였다는 사실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빡쳐라 동해야’라는, 어딘가 처절한 원념이 담긴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데렐라와 캔디 이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계보를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KBS 일일극의 주인공답게 동해 앞에는 천로역정에 버금가는 가시밭길이 펼쳐진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입양된 정신연령 아홉살의 엄마 안나(도지원)의 존재나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증발해버린 아버지 제임스(강석우)의 부재는 문제가 아니다. 유학생이었던 여자친구 새와가 부잣집 아들 도진과 결혼하기 위해 동해를 무참히 차버리고, 새와를 구하려다 부상당한 동해는 촉망받던 쇼트트랙 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이 와중에도 동해는 꿋꿋하게 호텔 주방에 재취업하는 데 성공하지만 호텔 사장의 며느리가 된 새와는 기어이 동해를 쫓아내려 갖은 음모를 꾸미고… (중간 100부 생략) 시아버지 김준이 동해의 아버지 제임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새와는 또다시 동해를 쫓아내기 위해 엿듣기와 물건 훔치기, 이간질과 협박을 감행한다.
하지만 어떤 계략도 들통나는 데 30분 이상이 소요되면 안된다. 서로서로 엿들을 수 있도록 항상 문은 조금 열어두되, 중요한 물건은 자물쇠 없는 서랍이나 옷장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 부득이하게 회차가 넘어갈 경우 상대가, 주로 새와가 저지른 죄목을 낱낱이 읊어주는 것은 필수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게 아니라, 오늘 한 짓을 내일은 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극과 남녀 주인공의 포커페이스로 귀기마저 뿜어냈던 전설의 일일극 MBC <황금물고기>에 이어 요즘 <웃어라 동해야>를 본방사수하고 있는 한 친구의 말은 ‘도대체 시청률 40%의 비밀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한 줄기 힌트가 되었다. “헬스장 가서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러닝머신 뛰면 딱 좋아. 무슨 얘긴지 몰라도 다 아니까 몰입도 짱이야!”
‘몰라도 다 안다’, 이 획기적인 시대정신이 시사하는 바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 팬들이 펜션에서 선거운동용 콜센터를 차렸든 말든 나는 모른다(엄기영). 청년실업률이 높은 이유는 문사철 전공자들의 과잉 공급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박재완). 그리고 <웃어라 동해야>의 마지막은 동해의 신부 봉이(오지은)의 임신으로 모두가 활짝 웃는 장면일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카멜리아 김치 1kg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