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미안하지만 '똘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랬더니 "좀 그런 것 같다"며 싱긋거렸다.
"여전히 '내가 배우다' 뭐 이런 생각은 하지않아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연기? 그냥 하는 거죠. 재미있잖아요. 연기는 아무래도 내 팔자였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요즘 SBS 월화극 '마이더스'에서 시청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주인공이다. 배우 윤제문(41). 거듭 미안하지만 진짜 '똘기'가 흘러넘친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웃음이 터졌다.
2005년 '남극일기'를 시작으로 영화계에서는 이미 주ㆍ조연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그지만 TV에서는 '마이더스'가 그를 스타덤에 올렸다. 앞서 그는 2009년 시청률 39.9%로 막을 내린 KBS '아이리스'에 출연하며 TV 드라마의 위력을 톡톡히 실감했다. 동네 아줌마, 할머니까지 아는 척하는 '호사'를 누린 것. 그런데 '마이더스'는 반대로 시청자가 그의 위력을 확인하고 열광하게 만든 작품이다.
장혁, 김희애 주연의 '마이더스'에서 그는 비열한 재벌 2세 성준 역을 맡아 강한 카리스마와 내공으로 주인공들을 압도하는 매력을 발산 중이다. 특히 초반에는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인 강렬한 캐릭터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가 두 주인공에게 잇달아 당한 후에는 빈 구석이 많은 허당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두 인물을 연기하는 듯한 재미를 주고 있다.
"그러게, 저도 처음의 캐릭터를 밀고 나갈 줄 알았는데 가다보니 바뀌더라고요.(웃음) 당황한 것은 없어요. 누구나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성준이라는 인물도 이런저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섭게 노려보고 욱해서 버럭대는 면이 있는가 하면 바보같은 면도 있는 거죠. 성준이가 초반에는 악독했다가 뒤로 갈수록 형(최정우 분)과 '덤 앤 더머'로 변하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제가 즐기면서 하면 시청자도 성준의 모습을 다이내믹하게 받아들이며 같이 즐기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무릎을 꿇고 벌을 서다가 일어서면서 호들갑스럽게 괴로워하던 연기는 압권이었다. 독사 같던 재벌가 황태자의 망가진 모습을 은밀히 엿보는 듯한 재미를 줬다.
"유독 무릎 꿇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몇 초만 꿇고 있어도 저려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참고로 했죠. 성준이라면 지금껏 한 번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을테니 그럴 것 같았아요."
성준은 그가 지금껏 맡은 역 중 최고 부자다. 서민, 조폭 연기 전문이었던 그가 재벌 2세로 신분이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근사한 재벌은 아니다. 머리도 별로 안 좋다. 인터넷에는 '같은 재벌 2세인데'라는 제목으로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그를 비교하는, 폭소를 자아내는 글도 올라왔다.
"저도 봤어요. 뭐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니….(웃음) 성준이가 지금까지 제가 맡은 역 중 최고 부자이긴 한데 머리가 썩 좋지는 않아요. 공부도 잘 안했을 것 같고, 늘 돈으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인간이죠. 정직하지도 않고. 그래서 재벌 2세 연기라고 하는데 딱히 좋은 건 없네요.(웃음)"
그는 '재미있잖아요'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무심한듯, 심드렁한듯한 대화법이 순간순간 당혹스럽게도 했지만 '재미있잖아요'라는 말에 그의 간결한 진심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타고난 광대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똘기'가 있는.
그는 늦게 연기를 시작했다. 1995년 스물다섯에 연극판에 뛰어들며 연기를 시작한 그는 "자라면서 연기는 꿈도 꾸지 않았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대 시절 친구 따라 문성근-강신일 주연의 연극 '칠수와 만수'를 보러갔다가 '야,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어요. 그 후 지나다니면서 연극 포스터가 눈에 띄더라고요. 군에서 제대 후 형이랑 천안에서 레코드 도매업을 했는데 재미가 없어 그만뒀어요. '이제 뭘하지' 생각하다 불현듯 '연극이나 해볼까' 싶었어요.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때 아니면 나중에는 못할 것 같아 뛰어들었죠."
극단 산울림에 입단해 처음 1년은 스태프로 일했다. 그러다 연희단거리패의 '우리극 연구소'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게 된다.
"산울림 2층 연습실에서 즉흥연기를 하며 연기를 배우던 날이었어요. 전 당시 상대 배우가 정색하고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서 웃으면서 연기를 했는데 우리를 둘러싸고 앉아 연기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해서 놀랐던 기억이 나요. '이게 뭘까' '무대에 서볼까'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처음엔 뭣도 모르고 했죠. 그런데 희한했던 것은 전 처음에도 연기 못한다고 욕을 별로 먹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선배들이 '어라, 저 놈 봐라'라고 했어요. 두려움 없이 마음대로 연기를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연기가 재미있었어요."
갑자기 별명이 궁금해 물었다. "'문제아' '대학로 하이에나' 정도?" 속으로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도 연기하는 게 재미있기만 할까.
"연기해서 돈을 받으니 책임감이 들죠. 이제는 재미 위주로만 할 수는 없죠. 연기하는 게 힘들죠."
어울리지 않게 모범답안이 나와 '여전히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시비를 걸었다.
그랬더니 이내 개구쟁이처럼 웃으면서 "솔직히 힘든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막 하는 것 같다"며 인정했다.
영화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우아한 세계'에 잇달아 조폭으로 출연할 당시 술자리에서 만난 실제 조폭으로부터 "나랑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는 "그말 듣고 한동안 조폭 연기는 거절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상관없다"며 "들어오는 역은 다 한다. 가리는 것 없다"며 웃었다.
그는 최근 영화 '위험한 흥분'의 촬영을 마쳤으며, 올가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출연한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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