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이라는 말은 거의 경멸어가 되었다. 오늘날 수사학은 말이나 글의 텅 빈 내용을 가려주는 ‘포장’, 혹은 ‘장식’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고대에 그것은 사회에서 모든 이가 배워야 할 필수교양으로 여겨졌다. 당시 법정에서는 당사자가 말로 자신을 변호하며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했고, 폴리스에서 공직을 맡거나 맡으려는 사람들은 말로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수사학은 그저 문체에 흐르는 윤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말이나 글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의미했다.
수사학이 경멸어가 된 것은 근대의 과학주의와 관련이 있을 거다. 과학에서 수사학은 불필요한 장식일 뿐이다. 물론 문체가 필요한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문체는 학문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훌륭한 문체를 가져야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근대의 정치도 수사학을 경멸어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은 늘 수사를 남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늘어놓는 수사가 얼마나 공허한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공허하다’고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를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광고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잖은가.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치인이나 이데올로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지만, 그들의 수사학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수사학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패러프레이즈하자면, ‘한 사회의 지배적 수사학은 지배계급의 수사학’일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 앨버트 허쉬먼은 보수주의의 수사학을 분석한다. “지난 200년을 지배해온 반동의 수사학”은 크게 세 가지 가치를 표적으로 삼아왔다. 첫째는 법 앞에서 ‘자유’, 즉 법으로 보장되는 인권과 신분의 평등이라는 가치, 둘째는 정치에서 ‘민주’, 즉 대중의 보편적 참정권이라는 가치, 셋째는 경제에서 ‘복지’, 즉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제도다. 허쉬먼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이 가치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개 세 종류의 수사를 사용한다.
보수주의의 세 가지 수사학
첫째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외려 반대의 결과를 내게 된다’는 논리다. 가령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던 프랑스 혁명은 결국 공포정치로 귀결되었다. 또 농민이나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줄 경우, 농장주나 공장주가 무식한 그들의 표를 매수함으로써 결국 과두정을 더 강화할 것이다. 나아가 빈민을 돕겠다는 선한 의지에서 도입된 복지제도는 외려 빈자들의 의존성만 강화하여 그들을 영원히 빈곤에 잡아두게 될 것이다. 이런 논법을 허쉬먼은 ‘역효과 명제’라 부른다.
둘째는 ‘그래봤자 기존 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토크빌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으로 도입된 긍정적 가치들은 실은 대부분 앙시앙레짐 시절에 이미 존재했다. 한마디로 굳이 혁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파레토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통치는 결국 엘리트가 하게 되어 있고, 조지 스티글러에 따르면 복지제도는 부자와 빈자의 세금으로 결국 정치적으로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중산층만을 배불리 할 뿐이다. 이런 논법을 허쉬먼은 ‘무용론 명제’라 부른다.
셋째는 ‘그렇게 하면 자유와 민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논리다. 보편선거권이 도입됐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다수의 지배가 소수의 기본적 자유, 즉 재산권을 위협할 것이라 주장했다. 복지제도가 도입되자 하이에크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자유와 민주라는 기본가치를 침해할 것이라 주장했다. 복지가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장은 그보다 앞서 나온 주장, 즉 복지가 그동안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것을 ‘위험 명제’라 부른다.
보수주의 수사학은 이렇게 근대 시민혁명과 노동운동의 성취를 무력화하려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의 냉소적 어법. 보수주의자들도 노골적으로 반동적 수사를 구사하지는 않는다. 이미 인류보편의 것이 된 가치를 함부로 부정할 수는 없잖은가. 때문에 그들은 그 가치들의 존재와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선의를 기꺼이 인정한다. 다만 그 선의가 늘 바람직한 결과를 낳으리라 믿는 것은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라 말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스스로 현자의 반열에 오른다.
사실 진보주의자들도 즐겨 보수주의 수사학을- 물론 물구나무 세워- 사용한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할 때, 진보주의자들은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것”이라 말한다. 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할 때, 진보주의자들은 “진보는 필연이기에 거기에 저항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은 항상 역효과를 낳는다”고 말할 때, 진보주의자들은 “개혁은 항상 상승효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소통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의 담론을 이 두 가지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로부터 구하는 길은 없을까? 여기서 앨버트 허쉬먼은 보수주의 수사학을 대체할 두 가지 대안적 자세를 제시한다. 하나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것 모두에 위험이 있으니, 양쪽의 위험을 정확히 검토하고 평가하고 대비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보수든 진보든 그들이 말하는 최악의 사태라는 것이 항상 확실히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한국 좌파의 수사학
한국의 좌파 역시 보수주의 수사학의 프레임을 즐겨 사용한다. 가령 한국의 이른바 정통 좌파는 ‘자유’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자유’란 기업을 위한 영업의 자유, 입 달린 중산층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의미할 뿐 인민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무용론’). 그들은 ‘민주’도 상대화하곤 한다. 자본주의하의 민주주의란 결국 금권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무용론’). 목소리 높여 민주를 외치던 이들이 아무 무리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담론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복지’를 공격하는 정통 좌파의 수사학이다. 그들에 따르면, 유럽식 사민주의를 도입한다고 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자본주의를 견디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줌으로써 체제의 극복을 더디게 할 뿐이다(‘역효과론’). 게다가 유럽의 사민주의는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로 인해 가능했다. 따라서 식민지 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유럽식 복지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가망이 없다(‘무용론’). 따라서 개량주의 노선은 사회주의라는 이상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위험론’).
적어도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늘어놓는 얘기가 한낱 ‘수사’에 불과함을 의식한다. 거기에서 그들 특유의 냉소주의가 나온다(물론 한국의 보수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특유의 진지함 속에서 자신의 수사를 ‘사실’로 믿어버린다. 한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적 과장이 어느새 신념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누가 수사학을 ‘공허하다’고 했는가? 설령 공허할지라도 그 공허함 안에 사람이 갇힐 수 있다. 그때쯤 되면 사람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말이 말을 한다”(Die Sprache spri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