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패밀리> 때문에 금치산자가 됐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의 이야기로, 그 이후에는 김인숙(염정아)의 복수심으로, 그리고 그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질주하는 <로열 패밀리>를 보면서 종종 정신이 혼미해졌다. 모리무라 세이치의 소설 <인간의 증명>이 원작인 <로열 패밀리>는 <히트>와 <선덕여왕>을 쓴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했고, 이들의 오랜 파트너인 권음미 작가가 집필을 맡은 드라마다. 손에 쥔 패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 이들의 드라마 작법은 종영을 앞둔 지금까지도 수많은 스포일러를 양산하고 있다. 열성적 시청자가 상상해낸 이야기의 전말은 이미 작가들이 창조한 세계를 넘어버렸다. 극중의 한지훈(지성)은 “진실은 나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작가들이 말하는 진실이 시청자를 구할 상황이다. 작가들이 <로열 패밀리> 15회 모니터링을 앞두고 있던 지난 4월20일 저녁, 그들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인간의 증명>이 <로열 패밀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부터 물었다.
-<로열 패밀리>는 2년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라고 하더라. 김영현_<선덕여왕> 전부터 기획된 작품이다. <최강칠우> 때 같이 했던 제작사인 퓨쳐원에서 원작인 <인간의 증명>을 가지고 와서 하자고 했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권 작가에게 같이 하자고 했다. 권 작가와는 원래 오랜 관계가 있었다. 박상연_<서동요>를 할 때, 권 작가가 보조작가로 일했었다. 권음미_김 작가님이 저의 교육원 선생님이셨다.
-처음 같이 이 드라마를 하자고 했을 때, 권음미 작가의 반응은 어땠나. 김영현_되게 싫어했지? 제목을 들었을 때 지었던 표정도 기억나. (웃음) 권음미_원작이 너무 무서웠다. (웃음) ‘인간’에다가 ‘증명’이라는 주제까지 더해지니 압박이 정말 심했다. 두분이 같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믿고 간 거지.
-그럼 크리에이터로서 <인간의 증명>에서 끌린 부분은 무엇이었나. 박상연_일단 내가 알고 있기로 엄마가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인간의 증명>이 처음이었다. 물론 소설이 담고 있는 진실은 좀 다르지만, 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드라마라는 매체에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더라. 김영현_그렇게 말하면 집필작가가 열받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아니 그러면 안될 줄 알면서 했단 말이냐고 따질지 모른다. (웃음)
-원작의 이야기에 재벌가의 암투를 끌어오자고 한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 박상연_그건 권 작가님이 낸 아이디어였다. 권음미_원작을 따르자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컨셉이 대중적인 코드가 아닌 것 같더라. 하지만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란 설정은 가져가야 했다. 정치인에 버금가는 위치를 생각해보니 재벌밖에 없었다. 그런데 쓰다보니 정치보다 재벌이 더 무섭더라. 만날 모여서 하는 얘기가 누가 잡혀갈 거냐는 거다. (웃음)
-김인숙이 정가원에서 벌이는 복수극의 비중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았나. 김영현_처음에는 엄마인 김인숙과 재벌가 며느리인 김인숙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려 했다. 그런데 처음 대본이 나왔을 때, 정가원쪽 이야기에 대한 반응이 더 세더라. 그때 아무래도 김인숙의 캐릭터가 승부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가원의 이야기를 많이 붙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원작의 이야기를 대부분 수용하는 쪽도 고민했을 텐데. 박상연_했는데… 일단 원작의 수사과정이 상당히 어둡고 센 이야기였다. 그런 부분이 시청자에게 부담이 될 것 같더라. 그리고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일본 드라마가 기대만큼 아주 재미있지가 않았다. 원작의 주제를 충분히 견지한다는 전제하에 좀더 대중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 그릇을 찾아보자고 했던 거다. 김영현_무엇보다 원작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는 게 부담이었다. 수사관과 용의자, 딱 그뿐이다. 아예 수사드라마로 갈 거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니까. 말하자면, 김인숙과 한지훈의 관계를 엮는 게 각색의 가장 큰 포인트였다.
-정가원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어느 정도의 취재가 뒷받침된 건가. 권음미_재벌은 취재가 안된다. (웃음) 진짜 재벌이 만나주는 것도 아니고. 재벌 주변에서 일하셨던 분들이나 재벌과 가까이 계신 분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들의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내가 물어본 건… 음 이를테면 “전용기 내부는 어떻게 생겼나요?” 이런 거다. (웃음) 정가원 내 에피소드는 우리가 만든 게 더 많다.
-시청자의 부담을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김인숙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도 부담이지 않았을까. 박상연_언제부턴가 시작된 트렌드 같다. 이제 대중들이 착한 사람을 못 견딘다. 김인숙에 대한 호응에서 다시 그런 트렌드를 확인했다. 정말 <로열 패밀리>를 보면 누가 착한지 모르겠다. 주요 인물들끼리 누가 더 나쁜가를 놓고 경쟁하는 느낌이다. 권음미_솔직히 김인숙이 점점 착해지기는 했다. (웃음) 첫 대본에서는 원작의 야스기 교코랑 비슷했다. 그런데 쓰다보니까 버거운 거다. 김인숙에게 애정을 가지고 써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결국 우리 드라마는 원작보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경계가 상당히 모호해졌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쉽게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두 크리에이터의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로열 패밀리>는 미실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보인다. <선덕여왕>의 대사에 따르면 덕만은 미실이라는 적이 있어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로열 패밀리>에서는 드디어 미실인 김인숙이 공순호 회장이라는 더 큰 적을 만나 괴물이 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김영현_그런 식으로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재벌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 것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왕조사회에 벌어지는 일들과 성격상 비슷한 관계와 사건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게 선악의 개념으로 따질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인 거지.
-원작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인간의 증명’이다. 쉽게 개념을 잡기가 어려운 주제인데,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은 어떻게 했나. 박상연_주제 때문에라도 정말 우리끼리 촌스럽게 진지한 토론을 해야 했다. (읏음) 그때 나왔던 유의미한 컨셉이 있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난 그래도 악마는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면서 인간을 증명하는데, 우리는 그에 더해서 천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도 인간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보면 지금 누구는 김인숙이 천사가 아니라는 걸 밝히려 하고, 또 누구는 그녀가 악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하고 있다. 권음미_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 모호하게 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닌데… 그런 모호한 경계에 따라 작법도 달라지다 보니, 스포일러도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김영현_사실 대부분이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관계 설정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인데, 모든 걸 다 음모로 생각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 (웃음) 박상연_우리 드라마의 기운이 좀 그래. (웃음)
-엄 집사에 대해서도 그의 전사를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많다. 그 또한 김인숙과의 관계 때문인데, 엄 집사는 어떻게 정가원에 들어왔을까부터, 혹시 처음부터 김인숙과 함께 JK를 장악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 거다. 김영현_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다 생각했었다. 극중에서 엄 집사가 미8군사령관의 비서로 일할 때는, 사령관의 구두닦이에게도 줄을 대려고 하던 시점이었고, 그때 지금은 사진으로만 나오는 JK의 고 조경탁 회장이 아직 큰 재벌이 아닐 때 엄 집사와 인맥을 쌓게 된다는 식이었다. 그의 사연을 구상할 때는 강마담과 조경탁 회장도 엮었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다 넣기가 상당히 복잡했다. 대신 16회에서 엄 집사가 죽으면서 인숙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게 있다. 박상연_김인숙이 처음부터 JK에 어떤 목적을 갖고 들어왔다고 설정하지는 않았다. 실제 사람이 그렇지 않나. 그냥 흘러가다가 그때그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권음미_아예 처음부터 50부작으로 했어야 했다. (웃음)
-김인숙 외에 화제가 되는 인물은 공순호 회장(김영애)이다. 김인숙 못지않게 매력적인 캐릭터다. 김영현_악인의 조건은 포스인데, 이것도 원칙이 확고해야 나온다. 시드니 셸던의 <게임의 여왕>에 나오는 캐릭터를 생각했었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을까. 그러다보니 자식이고 비서고 간에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거다. 시어머니이기 전에 기업가로서 가진 자신만의 프라이드와 원칙들을 형상화했다. 박상연_아무래도 김영애 선생님의 연기에 힘입은 게 크다. 처음 캐스팅을 논의할 때는 <황진이>에서 보여주신 신경질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권음미_일단 공순호 회장은 한복 입은 재벌사모님으로 만들지 말자는 원칙이 있었다. 그런 캐릭터와 선생님의 의지가 잘 맞았던 것 같다. <아테나: 전쟁의 여신>에서도 국방장관을 연기하셨는데, 그 캐릭터와 공순호 회장처럼 비중보다도 다른 걸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으려 하셨다고 하더라. 정말 의지가 대단하시다. 무엇보다 본인이 공순호 회장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이입하고 계신다.
-<로얄 패밀리>의 초반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몰아쳤던 건, 아무래도 크리에이터의 역할이었겠다. 박상연_아무래도 난 영화를 하다가 늦게 왔기 때문에, 방송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가져야 했다. 내가 볼 때 드라마는 시간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윤리다. 그리고 미니시리즈라면 실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트> 같은 경우는 맥이 끊긴 수사드라마를 다시 새롭게 해보자는 게 있었고, <최강칠우>도 시청률은 좋지 않았지만, 나름 새로운 사극을 해보려고 했었다. 이번에는 미칠 듯한 속도감을 보여주려는 게 목표였다. 김영현_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시청자의 눈길을 잡으려고 한 거잖아. (웃음) 뒷부분에 나오는 이야기가 걱정돼서 그랬다. 권 작가는 왜 그런 걸 날 시킨 거냐고 하겠지만, 사실 너무 우울한 이야기가 나올 거니까 앞부분에서 커버를 해야 했다. 적어도 앞부분에서 시청률이 10% 정도는 나와야 뒤에서 7, 8% 정도가 나오겠더라. 그런데 하필 초반에 <싸인>과 겹쳐서 7,8% 정도밖에 안 나왔다. 박상연_5부에 가서 14%로 뛰는데 정말 신났다. <선덕여왕> 때도 6%가 뛴 적은 없었다. 이제 더 밀고 가보자는 게 있었는데, 한편으로 마음속에서는 이제 곧 조니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럽더라. 권음미_그래도 난 그냥 감사했다. 7부까지는 계속 상승세였고, 걱정했던 것에 비해 수·목드라마 중 1위를 지키고 있으니까.
-결국 우려대로 시청률은 떨어졌다. 권음미_딱 정확히 8부부터 떨어지더라. 박상연_김 작가님이랑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시청률을 올리려고 했으면 전체 16부라고 했을 때 조니를 14부 엔딩에 등장시키도록 하거나, 인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아들이 마크 저커버그 정도는 돼야 했다고. (웃음) 김영현_우리로서는 지금 이야기에 시청자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일단 보면서 불쾌해한다는 거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은 있다. 크리에이터라면 집필작가가 이후에 다른 작품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거고, 또 앞으로도 이런 장르가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니까. 우리가 예상을 안 했으면 모르는데, 정말 예상대로 조니의 등장과 함께 위축이 되니까 더 힘든 거다. 앞으로 내가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괴롭다.
-김인숙의 하향곡선 외에 인물들의 멜로 코드를 더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시청자도 꽤 있는 것 같다. 김영현_<로열 패밀리>처럼 기존과는 다른 장르물을 할 때 멜로가 항상 걸림돌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권음미_맨 첫 번째 버전은 멜로를 아예 빼기도 했었다. 하지만 관계를 설정하는 측면에서 볼 때, 멜로 코드를 아예 빼는 게 오히려 더 무리가 있더라. 박상연_멜로 코드가 시청률을 위한 설정은 아니고 개연성을 다져주는 작업인 건데, 아직 그런 난제까지는 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다음 작품은 한석규와 장혁이 출연하는 <뿌리 깊은 나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줄 전체적인 시도를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김영현_그 작품도 시도하는 게 많아서 걱정이긴 하다. 음… 언어와 권력? 권음미_그런 것 좀 하지 마시라. 인간, 증명 이런 것도 압박이 심한데, 이번에는 언어와 권력이라니. (웃음) 박상연_의도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는 이야기인데, 물론 드라마는 그것이 옳았다고 가는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훈민정음의 창제 의도를 한번 의심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용감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종에 대한 재해석도 나름 쇼킹하지 않을까 싶다. 김영현_너무나 확실한 팩션인 원작이 있고, 거기에 다른 이야기를 더해서 가는 건데, <뿌리 깊은 나무> 때문에라도 <로열 패밀리>가 더 많은 호응을 얻었으면 했다. 또 다른 시도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시청자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