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이 개봉된 뒤 윤종찬 감독은 호서대 영화과 교수직을 내놓았다. 안정된 수입을 생각하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지만 “벼랑 끝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이다. 1주일에 3번만 나가 수업을 진행하면 되지만 작품 활동과 병행하다보면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거라는 생각도 컸다. <소름> 이후 5개월 만에 만난 그는 조금은 느긋할 만도 한데 여전히 치열하다. 그는 “첫 영화보다 더 어렵다”고 운을 뗀다. “<소름>이 흥행에 실패하는 걸 보면서 스타 캐스팅도 염두에 두고 메이저가 배급하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런 만큼 흥행에 대한 부담이 크다. 어느 순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게 아닌가 스스로 반문하게 된다.”
윤종찬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씨앤필름(대표 장윤현)에서 제작하는 작품이다. 씨앤필름은 자체 개발하던 시나리오를 <소름> 개봉 무렵 윤종찬 감독에게 전했다. 당시 <그녀의 아침>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 시나리오는 윤종찬 감독의 눈에 들었고 그로부터 5개월간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이야기의 주축은 남녀의 사랑이다. 교통방송 캐스터를 하는 여자와 경찰청 교통상황실로 출퇴근하는 그녀를 눈여겨본 어느 형사의 사랑, 그러나 이 사랑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데자뷔를 경험한다. 그녀의 삶은 이전에도 같은 장소에서 어떤 사건에 휘말려 끝났으리라는.
남자는 그녀로부터 전 애인의 느낌을 받는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전 애인도 교통방송 캐스터였다. 남자는 전 애인의 자리에 온 그녀에게 끌린다. 얼핏 엇갈린 인연을 다룬 평범한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소름>을 경험한 관객이라면 조금 다른 것을 상상할 만하다. 윤종찬 감독은 운명적으로 얽힌 남녀의 멜로드라마를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수법으로 풀지 않는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남자의 직업이 형사라는 데서 범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겠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삶의 불가해한 느낌은 중요하다. 그는 번번이 똑같은 굴레에 부딪히는 어떤 여인의 삶에서 인생이 주는 두려움과 열패감을 직시한다. 전면에 내세운 것은 남녀의 사랑이지만 그 속에 무시무시한 운명의 힘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건네받았을 때 윤종찬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여자의 기억이다. 그가 만든 단편 <플레이백>이나 <풍경>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는 여자가 보는 데자뷔에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를 설정해주느냐에 영화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화면 분위기는 <소름>처럼 콘트라스트가 강하겠지만, <소름>보다 따뜻하고 밝은 엔딩이 기다린다고 덧붙인다. 사실 그는 <소름>을 끝내놓고 <소름>처럼 비극적인 이야기 정반대편에 있는 환한 러브스토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었다. 이번 영화가 어느 정도 <소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애초 의도와 어긋난 일이지만 전작이 비슷했다는 이유로 일부러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피해갈 필요는 없다는 게 윤종찬 감독의 판단이다.
“내 나름의 틀이 잡힐 때까지 다양한 작품을 해봤으면 싶다. 기존의 리얼리즘 문법을 벗어나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다. 이번 영화가 <소름>과 비슷한 요소를 갖고 있지만 분명 다를 것이다. <소름>에서 못했던 몇 가지 시도를 할 생각이다.” 아직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은 윤종찬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2002년 1월쯤 시나리오를 마무리짓고 3∼4월경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어떤 영화
교통방송 캐스터인 여자, 그녀는 경찰청 교통상황실로 출퇴근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어느날부터 이상한 기시감을 접하게 된다. 왠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여자는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경찰청을 드나들면서 그녀를 알게 된 형사, 그는 여자로부터 죽은 애인의 분위기를 느낀다. 가스폭발사고로 죽은 그의 애인도 교통방송 캐스터였는데 그녀의 자리에 비슷한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벗어나려 애쓰는 기억의 정체에 한발한발 다가서며 사랑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