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를 집에 두고 마신 건 지난 겨울부터였다. 서울은 추웠고, 술을 찾는 날은 늘었고, 그러니 한병 정도 있으면 든든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멋있기도 했었다. “국가의 보드카 독점은 언제나 강력하고 견고하며 안정된 권력, 안정된 사회상의 증거였다.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면 보드카는 통제를 벗어났다.”(<미식견문록>)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거나 저항하려 할 때 함께하는 술이라는 이미지랄까. 가격이 싸기도 했다. 면세점에서 발견한 앱솔루트 보드카 1L는 우리 돈으로 약 1만5천원. 750mm짜리를 3만원가량에 판매하는 국내 대형마트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스카치 잔 2개와 토닉워터 5병, 라임즙 2병을 사서 칵테일로 마시고, 평소 내 방에 숨겨둔 술병에 관심이 많은 엄마도 한잔씩 하고, 종종 스트레이트로도 마시다 보니 겨울이 갔다.
사실 평소의 음주 취향으로 볼 때, 보드카가 특별히 맛있거나 어떤 감흥을 전하는 술인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재미로 보드카를 마신다고 하는데, 나에게 보드카의 매력은 어디까지나 ‘정량’이다. 스트레이트로 1잔을 마시나, 칵테일로 1잔을 마시나 더 마시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안줏거리를 찾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장점 중에 하나다. 소주 1병은 마셔야 할 걸 보드카 한잔으로 끝낸다는 내 이야기에 처음 “어디서 차도남 코스프레냐?”며 핀잔을 주었던 여자친구께서도 네미로프란 보드카 브랜드의 미니 5종세트를 선물해주셨다. 한때 타이슨의 스폰서였다는 네미로프는 우크라이나가 원산지인 보드카다. 오리지널 1병을 제외한 나머지 4병에는 각각 자작나무, 꿀과 고추, 크랜베리, 호밀과 꿀이 섞여 있다. 이중 가장 놀라운 맛의 술은 꿀과 고추가 담긴 3번 병이다. 안 그래도 격한 보드카에 캡사이신이 섞여 더 격한 향을 남기는데, 빈속에 한 모금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바로 여유를 찾는다. 고추까지도 받아들이는 보드카의 넉넉함에 감화된 요즘은 집 안에 있는 각종 액상을 보드카에 섞어 마셔보는 중이다. 둘째 작은아버지가 지난 추석 때 갖다주신 매실청, 엄마가 친구들과 함께 수렵한 산딸기로 담그신 복분자주, 엄마가 조카를 먹이겠다고 만든 사과잼 등등. 혹시 남는 보드카로 따라해보시려거든, 아직은 따라하지 마시라. 올해 안에는 꼭 적정한 배합비율을 찾아내 공개하겠다. 아직은 사람이 먹을 만한 맛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