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광야에 살던 모세가 신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야훼는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신의 목소리를 들은 모세는 자신이 언변이 변변치 못하여 말로 파라오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야훼는 모세에게 언변이 좋은 형 아론을 데려가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야훼가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호명’하고, 아론을 통해 말주변이 없던 모세에게 ‘언변’의 능력을 부여한다는 모티브다.
신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모세만이 아니다. 가령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자다가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소년은 랍비가 부른 줄 알고 옆방의 스승에게 달려가나, 랍비는 소년을 부른 적 없다고 대꾸한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비로소 랍비는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야훼임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소년과 함께 기도를 올린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신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을 받아 언술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은 이들이 쓴 것이다.
예수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다고 한다. 갈릴리 동네에서 평범하게 살던 청년이 갑자기 광야로 나간 데에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성서에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모세처럼 예수 역시 야훼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극복하고 사회로 나간 예수는 더이상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본질을 꿰뚫는 시각과 직관적인 비유의 능력으로 청중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탁월한 연설가가 되어, 심지어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시장과 국가의 부르심
중세의 가을이 저물고 종교 개혁기에 이르면 신의 ‘부르심’이라는 모티브의 내용이 급격히 세속화하기 시작한다. 가령 칼뱅의 ‘직업 소명설’에서 신의 부르심은 더이상 선지자들의 성스런 사명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세속적 활동의 이름이 된다. 우리가 가진 직업 그 자체가 실은 신성한 신의 부르심이라는 얘기다. ‘vocare’는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로, 여기서 나온 말이 ‘직업’을 의미하는 ‘vocation’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훗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정신적 기둥이 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직업’으로 사람을 부르는 그 주체란 결국 ‘시장’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직업이란 ‘자본’의 부르심이다. 변화는 토대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가톨릭이라는 보편적 교리 아래 정신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던 유럽은 교회권력이 무너지면서 서서히 여러 개의 민족국가로 나뉘기 시작한다. 근대적 민족국가의 형성기에 호명의 주체는 신에서 ‘국가’ 혹은 ‘민족’으로 변화한다. ‘신의 부르심’을 대신하여 등장한 ‘조국의 부르심’. 이것이 인간을 행동과 언설의 근대적 ‘주체’로 만들어준다.
조국의 부르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가령 소비에트 혁명기의 어느 포스터에서는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쓴 적군(赤軍) 병사가 포스터 밖의 관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 지원했는가?”라 묻는다. 2차대전 당시의 미군 징집 포스터에서는 성조기 문양이 그려진 실크 모자를 쓴 엉클 샘이 똑같은 제스처로 똑같은 질문을 한다. 흥미롭게도 나치 역시 포스터에 동일한 모티브를 사용했다. 철모를 쓴 독일군 병사가 손가락으로 포스터 밖의 관객을 가리키며 조국이 너를 부른다고 선동한다.
이런 것을 알튀세르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 부른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추상적 개인을 호명하여 그를 ‘주체’로 만들어준다. 이렇게 한 개인을 주체로 찍어내는 데에는 물론 가정, 학교, 직장, 언론을 포괄하는 ‘이념적 국가기구’가 관여한다. 개인은 호명에 응하여 주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사회 속에서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거울에 해당한다고 할까? 우리가 거울을 보고 자의식에 도달하듯이,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호명을 통해 만들어지는 자율적 ‘주체’란 실은 ‘이념적 국가기구’라는 타율을 통해 만들어진 ‘객체’에 불과하다. 신이 제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듯이, 자본 역시 제 형상대로 인간을 찍어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이념적 국가기구’는 가치관의 다양성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도 제 안에 자신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묵인한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가 부르주아의 관용을 넘어 체제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면, ‘이념적 국가기구’ 대신에 곧바로 ‘억압적 국가기구’가 출동할 것이다.
어디 국가와 시장만인가? 역사도 우리를 부르고, 민중도 우리를 부르고, 계급도 우리를 부른다. 이렇게 역사와 민중과 계급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고유의 담론과 독특한 행동의 주체가 된다. 물론 그 어디서든 ‘소명의식’을 느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언설이나 행위의 주체가 되려면 이데올로기의 거울이 필요하지 않은가? 문제는 그렇게 이데올로기에 호명당한 이들이 보여주는 독선일 거다. 장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열성적인 투사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와 관련이 있을 거다.
호명이라는 환청
‘신’이나 ‘국가’나 ‘계급’이라는 이념이 없이는 그 장한 일들을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주체가 되기 위해 굳이 특정한 이념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담론과 행동의 주체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알기로는 미셸 푸코가 죽기 직전까지 고민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말년의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실은 객체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수준을 넘어, 자아가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안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자아의 테크놀로지’라는 존재미학이다.
정치인들은 왜 출마했느냐는 질문에 종종 “국민이 불러서”라고 대답한다. 문제는, 국민은 그분들을 부른 적이 없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이 들은 것은 무엇일까? 귀신의 목소리? 역사와 민중과 계급의 부르심이라고 이와 다를까? 얼마 전 진보신당의 한 당직자는 “가치정당은 이념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신당은 그 이념을 찾기 위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떠났다. (…) 항해를 마칠 때 우리는 나라를 운영할 이념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나섰던 이유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강박’을, 말하자면 이념이 없이는 곧바로 정체성의 불안에 빠져드는 근대적 주체의 강박을 읽을 수 있다.
이 강박을 풀어주는 데에는 아마 개그맨 전유성의 전설적 퍼포먼스가 제격일 것이다. 언제가 그가 개그맨 후배들과 함께 해운대로 엠티를 갔다고 한다. 일행이 해변에 닿자, 전유성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들아, 바다가 나를 부른다.” 그 말을 뒤로한 채 그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더니, 옷을 입은 채로 물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이 목에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자 후배들은 혼비백산했다. 순간, 그가 뒤로 돌아 다시 물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홀딱 젖은 몸으로 돌아온 그가 후배들에게 말하기를, “얘들아, 바다가 나 안 불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