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7일까지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 02-758-2150
살과의 전쟁이 아니다. 작품 속 거대한 살은 곧 잉여자본이다. 창작극을 주로 선보여온 남산예술센터의 올 시즌 개막작인 실험연극 <살>은 결핍과 허기, 외로움을 잊기 위해 물욕, 식욕, 성욕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슬픈 초상이다.
무대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축소판으로 하루 수백억원의 돈이 디지털화돼 거래되는 외환딜링룸. 천재적인 감각의 환 딜러 신우는 욕망에 충실하다. 대신 몸은 비대해지고 지방으로 덮인 간은 망가졌다. 그런 신우 앞에 가혹한 선택의 상황이 던져진다. 간암 말기인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간이식 수술, 이식 수술 반대를 조건으로 건 세계적 헤지펀드사의 스카우트 유혹. 여기에 미네르바 사건에서처럼 수사당국으로부터 인터넷 논객 ‘프로메테우스’라는 혐의까지 받는다. 그야말로 ‘생간이 쪼이는’ 고통에 갈등한다.
연극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했다. 현대 문명과 자본이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인간에게 축복을 주고 있지만, 역으로 탐욕과 죄악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아이러니를 신우와 안나를 통해 재생한다. 고로 간암, 간이식 수술, 지방간, 생간이 쪼이는 고통 등으로 작품 전반에 모습을 드러내는 ‘간’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지닌 신우의 상징적 오브제다. 그리고 신우는 바로 우리다. 극은 욕망의 순환고리 안에서 끊임없이 달리는 우리에게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묻는다.
물질만능주의를 인간의 ‘살’에 빗대 비판한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다. 잦은 무대 전환으로 극의 템포감을 유지했고, 현란한 영상이 입체감을 더했다. 주인공의 내면을 상징화하는 군무는 참신하다. 그러나 벌거벗은 주인공 신우가 측은한 건 왜일까. 왜 그에게서 살내음이 느껴지지 않을까. 관념 과잉의 추상화를 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