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4일까지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 02-120
<입체면과 다포체 계수> <감마선으로 감지되는 펄서의 에너지 스펙트럼>…. 베르나르 브네의 작품에는 이공대학 리포트나 논문의 제목에나 등장할 법한 제목이 붙는다. 게다가 브네는 진짜 함수와 방정식, 도형과 각도만으로 캔버스를 채운다. 그러나 이것은 수학이 아니라 명백한 예술이란다.
그게 말이 되냐고 묻는 관객에게 브네는 이렇게 되묻는다. “미켈란젤로의 누드화는 예술인가 해부학인가? 나무와 바위 풍경을 그린 쿠르베의 그림은 예술인가 자연과학인가?” 브네는 한눈에 보는 순간 ‘이것은 미술’ 혹은 ‘이것은 과학’이라 단정짓는 명백함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역할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인데, 어떤 규정이나 원칙에 얽히는 건 안될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브네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도구’로 수학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나르 브네의 작품은 캔버스에 쓰여진 함수 그 자체만을 의미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수학기호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쓸데없는 곁가지들이 모두 배제된, 이성과 과학이 압축된 정수가 바로 베르나르 브네의 작품이다. 이처럼 ‘해석’이 중요시되는 미술계에서 ‘해석이 필요없는’ 작품을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베르나르 브네는 수학자의 얼굴을 한 예술계의 악동이다. 재밌는 건 따분한 수학기호들만 가득한 베르나르 브네의 작품에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한다는 것이다. 자크 시라크는 파리 시장 시절, 브네를 위해 샹 드 마르스에서 초청전시를 열었다. 2010년 브네가 조각 작품전을 개막할 때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전시회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데 익숙한 프랑스가 조국이라는 점은 아마 브네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브네는 회화, 조각, 퍼포먼스,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예술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건 1961년부터 2011년까지 브네의 회화 작품들이다. 1961~63년작 <타르>는 캔버스 위에 타르를 부은 뒤, 붓을 사용하지 않은 채 타르가 이루는 불규칙한 층에 주목한 작품이다. 수정하거나 가공하지 않고, 오직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브네의 특성을 엿볼 수 있는 초기작이다. 하얀 캔버스에 오직 수학 도형만 그려져 있는 초기작에 비해 2000년대 작품은 색이 다채롭고 더 복잡한 기호들이 등장한다. 확고한 스타일 안에서 시대별로 진화를 거듭하는 브네의 작품을 바라보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