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비평’(Rettende Kritik)이라는 말이 있다. 용어는 발터 베냐민의 것이지만, 그 생각은 멀리 레싱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독일의 비평가는 계몽의 일환으로 그동안 잘못 이해되어왔던 고대의 저자들을 변호한다. 마치 변호사가 법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듯이, 레싱은 고대의 저자들의 미학적 누명을 벗겨내려 한다. 오랫동안 그들의 예술적 한계로 지적되었던 단점들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결코 탓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 이런 식으로 고대의 저자들을 세간의 편견에서 구해내는 것을 그는 ‘구원’(Rettung)이라 불렀다.
망각의 바다에서
역사학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 예가 될까? 가령 비겁하고 비열한 자로 여겨졌던 원균이 실은 이순신 못지않게 훌륭한 장수였다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에게 사악한 여인으로 알려진 장희빈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자의식을 가진 주체적 여성으로 나타날지 모르고, 교활한 인물로 알려진 한명회도 정치학의 관점에서는 한국의 마키아벨리 같은 존재로 드러날지 모른다. 이렇게 전승 속에서 오해와 편견의 희생이 되었던 인물들에게 새로운 빛(=관점, 해석)를 비추어 그들을 구해내는 것이 바로 레싱이 말한 ‘구원’의 개념이다.
세간의 편견을 타파한다는 의미에서 레싱의 ‘구원’은 계몽의 프로젝트였다. 베냐민의 ‘구제비평’에서는 세속적 ‘계몽’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또 레싱이 ‘인물’의 구제에 주목한다면, 베냐민은 주로 ‘작품’을 구제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신이 인간을 타락의 상태에서 구원하듯이, 베냐민은 작품을 전승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의 망각에서 구원하려 한다. 이 경우 비평은 마치 해녀가 물질을 하듯이 과거의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가 거기서 망각된 진주를 캐내는 작업에 가까워질 것이다.
하지만 ‘구제비평’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차원이 있을 게다. 가령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다”는 베냐민의 비평 원리가 그것이다. 이는 텍스트 비평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사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물 자체를 향할 때, 비평은 인식론적 해석의 작업이 아니라 존재론적 구원의 사역이 된다. 하지만 사물과 기호는 다르다. 따라서 사물을 기호처럼 읽으려면, 먼저 사물과 언어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여기서 베냐민은 유대교의 창조신화를 도입한다.
유대의 창조설화에 따르면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결국 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은 목소리가 없기에 그 말씀을 발화할 수가 없다. 침묵하는 사물에 목소리를 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 인간의 언어. 신은 아담을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로 이끄시고, 아담이 일컫는 바가 곧 사물의 이름이 되게 하셨다. 아담의 언어는 명명하는 언어다. 물론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제멋대로 붙인 것은 아니다. 그는 사물에 내재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것을 인간의 목소리로 충실히 옮겼다.
말씀이 들어 있기에 그 시절엔 사물도 인간과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인간과 사물은 ‘너와 나’(1인칭-2인칭)의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곧 타락의 역사가 시작된다. 타락한 인간들은 ‘아담의 언어’를 버리고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바벨의 언어 속에서 인간과 사물은 ‘나와 그것’(1인칭-3인칭)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사물은 더이상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한갓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보편적 타락의 상태에서 다시 아담의 언어를 회복해 사물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곧 신의 창조 사역을 돕는 일이란다.
‘비평’(kritik)은 ‘위기’(krise)의 산물이다. 둘은 동일한 어원에서, 즉 ‘가르다,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kritein’에서 유래한다. ‘구제’로서의 비평은 위기의 시대에 사물을 구원해야 한다. 가령 언젠가 새만금 개펄이 매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수경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만금에 사는 억조창생을 대변해 말을 하고 있다.’ 타락의 언어, 바벨의 언어가 자연을 그저 ‘자원의 보고’로 바라본다면, 구원의 언어, 아담의 언어는 이렇게 목소리 없는 피조물들에게 인간의 목소리를 부여해 그들이 자신을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구제비평’에서 초월적, 신학적 계기를 걷어내자. ‘결코 씌어지지 않는 것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우리는 마치 문헌을 읽듯이 사물을 읽어낼 수가 있다. 가령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읽음으로써 아직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의 문화를 재구성해내지 않던가. 하지만 고고학의 일상에 속하는 이 작업에는 ‘구제’의 의미가 빠져 있다. 물론 유물을 읽는 것 역시 베일에 가려 있던 한 시대를 무지의 어둠에서 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그로써 유물의 권리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평으로 사물을 구원하는 예를 아마도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볼 수 있을 거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현대예술은 나치에게는 반민족적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고, 스탈린에게는 반계급적 퇴폐 예술로 간주되어 배척당했다. 심지어 루카치마저도 모더니즘을 몰락기 부르주아의 문화적 퇴행으로 보았다. 대중은 대중대로 현대예술을 비웃었다. 이런 위기에서 아도르노는 비평을 통해 모더니즘 예술을 구제하려 한다. 현대예술은 내용 없는 형식이기에, 그의 비평은 작업은 형식을 읽는 것, 즉 사물을 읽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의 ‘형식’ 속에 말없이 침전되어 있는 메시지를 읽어낸다. 가령 현대예술이 추한 것은 사회 자체가 추하기 때문이다. 현대회화가 추상으로 치닫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몽타주가 된 것은, 현대의 분업 체계 속에서 인간 노동이 전체성을 잃고 파편화했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이 불협화로 가득 찬 것은 현대사회의 불화를 반영한다. 현대연극이 부조리해진 것은 사회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며, 현대시가 무의미해진 것은 사회에서 이미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괴와 구원
구제비평이 무조건적 변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의 어원이 된 ‘kritein'은 ‘가르다, 나누다’라는 뜻이다. 비평이란 어디까지나 작품이나 사물을 언어로 분절화하는 작업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가르고 나누는 불화의 작업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에게서 현대예술이 오직 사회와 화해를 거절함으로써만 사회와 진정한 화해에 도달하듯이, 비평은 사물과 작품을 구원하기 위해 외려 그것들을 냉정히 가르고 나누어 해체한다. ‘구제비평’이라는 표현은 언뜻 형용 모순처럼 보이나, 그 안에서 구원이라는 ‘호의’와 비판이라는 ‘적의’는 하나로 종합된다.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결국 말없는 사물을 읽는 작업이다. 그것은 말없는 사물에 인간의 목소리를 주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을 말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바벨의 비평은 사물을 제 편의대로 재단하나, 아담의 비평은 사물에 들어 있는 언어적 본질을 온전히 읽어낸다. 구제비평은 사물을 명명하던 아담의 작업을 연장하는 일이며, 그로써 신을 도와 신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는 길이다. 위기의 시대에 세계는 구원을 기다리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예민한 비평가의 귀에는 사물들의 그 소리없는 구원의 요청이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