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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범 "현실에 맞닿은 이야기 하고 싶어">
2011-03-27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영화 '무산일기'를 연출한 박정범 감독은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에 비견된다. 장편 데뷔작으로는 드물게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다.

박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마라케시영화제 대상, 로테르담영화제 대상 및 국제비평가협회상, 도빌영화제 심사위원상 등을 수상하는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다음 달에도 홍콩국제영화제, 코펜하겐국제영화제, 트라이베카국제영화제 등 7개의 국제영화제에 작품이 출품된다. 그의 작품이 국제영화제 25관왕인 '똥파리'에 비교되는 이유다.

"졸업작품(동국대 영상대학원)으로 찍은 영화인데, 이처럼 주목을 받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만약 가난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그렇게 큰 주목을 받았을까요? 탈북자와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녹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거죠. 소재적인 측면이 커요. 영화가 과대평가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는 그가 2008년 완성한 '125 전승철'을 토대로 했다. 21분에 불과한 단편 상영시간은 '무산일기'에서 6배인 127시간으로 껑충 뛰었다. 인물과 에피소드를 늘렸다. 그는 "상영시간이 늘었지만, 영화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승철이가 교회에 다녔던 여자를 짝사랑했고, 탈북 브로커들이 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이야기들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들리는 이야기죠. 다만 승철이 노래방에서 일하는 장면은 제가 인위적으로 극화한 부분입니다."

3년 전 위암으로 숨진 전승철은 박 감독이 대학 시절 3년간 같이 살았던 탈북자 후배다. 그를 속속들이 아는 박 감독이 직접 승철을 연기했다. 맞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실제로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리얼리즘 경향을 추구하는 영화의 톤과 전반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몇몇 장면이 있다. 극 초반 도덕군자이지만, 막판에는 친구를 배신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승철의 경우가 그러하다. 승철의 변화가 극적인 탓에 다소 이물감이 느껴진다.

"탈북자들은 모두가 착해보여요. 하지만 그들도 사람입니다. 취하면 어두운 면이 나오기도 하죠. 견디기 어려운 어떤 지점에 이르면 과거로 회귀하는 순간이 있어요. 자기 안의 괴물이 나오는거죠. 하지만 괴물을 본 후 곧 후회하게 됩니다. 저는 설사 그런 탈북자들의 모습을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어 승철의 배신에 대해 "숙영이 손을 내밀었을 때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편입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던 것"이라며 "승철은 도덕을 버리고, 숙영이 있는 성가대에 편입하고자 구두, 양복을 산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극적인 드라마보다는 사실주의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한다. 그의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나 이창동 감독의 숨결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창동 감독이 '시'를 연출할 때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치밀하게 분석했다.

"이창동 감독님의 작품의 모든 커트를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그분의 영화를 많이 봤어요. 이 감독님은 내적인 부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그래서 모든 장면마다 어떤 진실 같은 걸 담고 있죠. 제가 따라가려면 너무나 먼 경지예요."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느낌이 묻어있다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다"며 "다르덴 형제, 켄 로치, 마이크 리, 크리스티안 몬쥬 감독 등 리얼리즘 계열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많이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감독들의 영화는 일상의 흐름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일상의 한 부분을 뜯어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던져버린다고 할까요? 사실 우리가 사는 일상이 완결성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일상을 비일상처럼 신선하게 느끼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고 영화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대학 졸업(연세대 체육과) 후 무작정 막노동을 전전했다. 꽃게잡이 배까지도 탔다. 그러다 돈이 생기면 틈틈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영화를 각종 영화제에 출품했지만 족족 떨어졌다고 한다.

"한 2년여간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매번 떨어지더군요. 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으면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영화는 꾸준히 만들었다. 그의 책상 안에는 완성된 필름은 계속 쌓여만 갔다. '125 전승철'도 만족스럽지 않아 사장될 뻔했으나 촬영감독의 반협박에 밀려 영화제에 출품했고, 서울독립영화제 등 유수의 국내영화제서 큰 사랑을 받았다.

전승철의 죽음에 대한 장편 영화는 언젠가 만들려고 했다. 10년쯤 흐른 후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스크린에 담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계획이 앞당겨졌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 때문이다.

"승철이가 죽고 나서 이창동 감독님에게 승철의 이야기를 했더니, 꼭 장편으로 만들어보라는 말을 들었어요. 제목도 단편 제목 그대로 가려고 했는데 모든 작품에는 이름이 있는데, 새로운 제목을 지어야 한다면서 감독님이 직접 '무산일기'라는 제목도 만들어주셨어요."

'무산일기'는 8천만원을 들여서 만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금 2천만원을 받았지만, 절반 이상의 제작비는 이곳저곳에 손을 벌렸다. 그는 "상금이 입금되면 빚을 다 값을 수 있다"며 웃었다.

'무산일기'로 주목받은 그는 올겨울 '산다'라는 영화를 찍는다. 강원도 산골에 사는 남자가 서울에 와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또다시 리얼리즘 계열의 어두운 영화다.

"저는 상업영화, 예술영화 구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자본이 많이 필요하게 되면 상업영화가 되는거죠. 지금은 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요. 언젠가는 밝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같은 영화를 찍는 게 제 꿈 중의 하나죠."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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