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오디션만 수 백번 떨어졌어요.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연기자가 더욱 되고 싶어졌죠."
화제의 복서 겸 연기자 이시영(29)을 21일 서울 인사동의 한 레지던스호텔에서 만났다. '4전 5기'의 복싱 신화를 이뤘던 홍수환을 스승으로 삼은 이시영은 복싱에서도 연기에서도 '4전 5기'를 떠올리게 했다. 수많은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연기자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시영은 26살 때인 2008년 드라마 '도시괴담 데자뷰 시즌3-신드롬'에 출연하면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영화 '홍길동의 후예' 등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그는 채 3년이 되지 않아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지금은 '복싱퀸'으로, 상업영화의 어엿한 여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데뷔까지 이시영의 역정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연예인이 꿈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정 연예인이 되려면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 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시영은 묵묵히 졸업을 기다렸다. 전공인 의상디자인(동덕여대)이 적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어렸을 적부터 가꾸어온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졸업후 기다렸다는 듯 5년여간 줄기차게 오디션에 도전했다. 기획사는 수십 번, 광고나 에이전시 오디션은 수백 번을 봤다. 그리고 붙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낙방은 일상이 됐다. 기대하는 마음은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배우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은 그를 더욱 강하고 단단한 여성으로 담금질시켰다.
"오디션을 보면서 안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나이가 많다'에서부터 '결혼이나 해라', 보다 직접적으로는 '넌 안될 거야'라는 말까지 들었어요.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이 일이 더욱 하고 싶어졌어요."
복싱 도전도 그런 오기가 바탕이 됐다. 작년 여자 복싱선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막극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돼 복싱과 인연을 맺은 그는 '연습벌레'라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복싱 연습을 너무나 싫어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3일을 연습해야 했어요.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핑계를 대면서 연습에 안 간 적도 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드라마는 찍어야 했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였나' '이렇게 의지가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진도가 나가다 보니 운동을 계속하게 됐죠."
복싱에 재미를 붙인 이시영은 지난해 11월 사회인 복싱대회인 KBI 전국 생활체육 복싱대회 48㎏급에 출전해 우승했으며 지난 2월 서울지역 아마복싱대회인 제47회 신인 아마추어 복싱전에서도 우승컵을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7일 폐막한 제7회 전국여자신인아마추어 복싱선수권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깜짝 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영화 '위험한 상견례'를 찍을 때는 촬영지인 부산에 가서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연습에 매진했다. 상대 배역인 송새벽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새벽 오빠도 몰랐죠. 제 사적인 일이잖아요. 제 본업은 배우니까, 제가 복싱을 한다는 걸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특별히 복싱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여배우는 얼굴이 생명이라는 통념을 깨고 미모가 망가질 가능성이 있는 거친 복서의 세계에 도전한 이유를 묻자, "복싱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습 과정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묻는 말에는 "체중 조절"이라고 했다. 그는 "먹으면 심하게 찌는 체질이라 평소에도 운동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이시영은 복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렸다. 쑥스러운 표정도 숨기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럽다"는 심경도 토로했다.
"사실, 복싱대회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그전부터 나갔는데…. (너무 주목을 받아) 사실 너무나 놀랐어요. 아직도 의아스럽고, 이해가 잘 안 돼요. 과한 칭찬을 받은 것 같아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요. 제가 잘한다는 건 연습했던 기간에 비춰 잘한다는 거지, 제 절대적인 수준은 결코 잘하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 부풀려져 부담스럽습니다."
연기이야기로 돌아가자 다시 활발해졌다. 그녀를 배우로서 알린 건 인기드라마 '꽃보다 남자'였다. 주인공 잔디(구혜선)를 질투해 위험에 빠뜨리는 악역이다. 안티팬들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너무 하고 싶은 역할이었어요. 팬들의 반응이 어떻다는 걸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안티팬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연기합니다."
그녀의 연기 경력은 데뷔 3년차로, 두텁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 출연 몇 편이 고작이다. 단역부터 차곡차곡 내공을 쌓아오지 못했다. 이시영은 그런 점이 "불안하다"고 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경력을 많이 쌓았으면 연기생활하기가 수월한데, 이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잖아요. 큰 역할을 맡다 보면 연기 논란도 생길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런 건 연기를 한 경력이 많이 작용하는 부분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이시영의 첫 영화 주연작 '위험한 상견례'는 3김(金)의 분화로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가던 1980년대 말을 배경으로, 전라도 남성과 경상도 처녀의 좌충우돌 결혼기를 다룬 코미디다.
그는 영화 '위험한 상견례'에서 전라도 청년 현준(송새벽)과 사랑에 빠지는 부산 처녀 다홍 역을 맡았다. 톡톡 튀는 부산 처녀의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표현했다. 부산 출신 가수 메이비로부터 사투리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신 있었는데 하다 보니 너무 어렵더라고요. 촬영장에서 녹음기 들으면서 열심히 했는데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감정을 많이 전달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사투리보다는 감정에 충실하려 했어요.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예쁘게 봐 주세요."
차기작은 로맨틱코미디 '커플즈'다. '홍길동의 후예'에서 호흡을 맞췄던 정용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다.
"코믹한 역할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일단 제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하려고 해요. 밝은 캐릭터를 인정받고 나서 다른 분야에 도전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어요. 이도 저도 아닌 변신보다는 지금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챔피언답지 않게 "소심하고 겁도 많다"는 이시영은 좀더 진지한 연기자가 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고 싶었어요. 화려한 모습이 좋았고,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시작은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일을 하게 되면서 점점 진지해지는 것 같아요. 좋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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