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독약, 단검, 방화가 우리 불쌍한 인생들의 진부한 캔버스를 그 유쾌한 디자인으로 수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담대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 우리 악덕의 추잡한 짐승들 중에, 더 추하고 더 악하고 더 더러운 놈이 있다. 비록 커다란 제스처를 취하지도, 커다란 울부짖음도 내지 않지만, 그놈은 지구 위를 어기적거리며 커다란 하품 속에 기어이 세계를 삼켜버리려 할 것이다. 그놈은 바로 지루함(ennui)이다! 독자여, 눈물이 고인 듯이 축축한 눈을 가진 그놈은 물 담배를 피우며 처형대를 꿈꾼다.” (보들레르 <악의 꽃> 서문)
실존의 지루함
철학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주로 ‘인식’이나 ‘지각’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인식론주의 전통에 익숙한 정신에 이른바 ‘실존철학’의 개념들은 매우 당혹스럽게 느껴질 거다. 가령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갑자기 ‘기분’(Stimmung)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을 생각해보라. 어떻게 그런 게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기분이란 학적으로 객관화하기에는 너무나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가. 하지만 하이데거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느낌은 이성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즉 세계는 ‘인식’을 통해 알려지기 이전에 먼저 ‘기분’을 통해 열린다.
느낌이 이성보다 근원적이라 보는 철학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언젠가 여기서 다룬 ‘역겨움’(Ekel)과 더불어 철학적 의미를 갖는 기분이 또 있다면, 아마도 지루함(ennui)일 것이다. 실존철학의 담론에서 ‘지루함’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예 현대인의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때 삶에 의미를 주었던 최종적 권위들(신, 국가, 이념)은 무너졌다. 산업화한 도시 속에서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무의미한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느낌. 이것이 현대인이 느끼는 지루함의 요체가 아닐까?
지루함에도 종류가 있다. 가령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지루함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내면에서 올라오는 지루함이리라. 삶 자체가 쳇바퀴처럼 돌고 있다는 느낌. 물론 지루함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 지루함은 휴식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며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 하지만 그 어떤 삶의 행위로부터도 의미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절대적 지루함은 인간을 보들레르가 말한 “처형대”로 이끌 수 있다. 자살에 반드시 처절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의 시 속에서 지루함은 악(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범죄에는 대개 동기가 있다. 가령 금전, 치정, 아니면 원한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전율케 하는 것은 동기가 없는 범죄다. 가령 ‘칼을 들고 나가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사람을 찌르겠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그래서 ‘묻지 마’ 살인이라 부른다).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외적 동기를 가진 다른 불순한(?) 범죄들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한마디로 그것은 조건이나 대가가 없는 순수악이다. 이런 종류의 범죄에 굳이 원인이랄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지루함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조커도 이와 비슷할 거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고담시가 미워서가 아니라, 고담시가 지루해서인지도 모른다. 그 지루함에는 물론 ‘배트맨’으로 인격화한 진부한 서사, 즉 ‘악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라는 위선적 서사에 대한 역겨움이 동반된다. 배트맨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조커라면, 금방 게임에 흥미를 잃고 인질로 잡은 이들을 그냥 풀어줄 거다. 오직 배트맨과의 대결만이 조커에게 재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도시의 평화를 원한다면, 배트맨은 고담시를 떠나야 한다. 그러면 조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한 진정한 이유 역시 ‘지루함’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의론>의 저자 마이클 샌들은 자신의 공동체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삶에 서사를 부여할 필요성’을 든다. 그의 말대로 삶이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내러티브가 있어야 한다. 패전으로 일본이 잃은 것은 바로 그 서사다. 전후의 일본은 전사의 미덕으로 이룩한 시적 위대함을 잃고, 이해관계만 따지는 경제동물들의 산문적 사회로 전락해버렸다. 얼마나 지루한가? 그 지루함을 깨뜨릴 서사를 도입하기 위해, 그로써 자신과 동족의 삶에 의미를 주기 위해 그는 배를 갈라야 했을 거다.
신의 자살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지루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신은 자신의 창조가 흡족했던 모양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은 정의상 전지전능한 존재. 모든 일의 진행을 이미 아는 신에게 세계가 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모든 결말을 미리 알기에 신은 웃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있기에 신은 슬퍼할 수도 없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면서 신은 이 우주적 규모의 지루함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인은 아마 자살일 것이다.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지루함을 이기는 방법일 수 있다. 빌렘 플루서는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종(種)을 만들어내는 기획의 열렬한 옹호자다. “왜 우리의 말들은 아직 초저녁 햇살을 받으며 초원 위에 형광색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의 예술가들이 팔레트 위에 물감들을 올려놓고 캔버스를 다채롭게 했듯이, 미래의 예술가들은 팔레트 위에 유전자를 올려놓고 동물의 신체에 다채로운 형광색을 입힐 거란다. 왜 그래야 할까? 그는 이렇게 정당화한다. “미래의 인류는 인구폭발, 환경오염 이전에 먼저 지루함으로 위협받을 것이다.”
삶에 의미란 게 있을까? 그런 것은 애초에 없을지 모른다. ‘의미’란 것은 근원적 지루함을 망각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서사’에 불과하며, 삶의 ‘서사’란 그저 삶의 근원적 무의미를 감추기 위한 뻔뻔한 허구일지 모른다. 실제로 몇몇 종교에선 그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하지만 종교에 귀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당에 올라가 영원히 예수의 설교를 듣거나,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세에서 영원히 재방송을 보는 게 덜 지루해 보인다. 종교가 인간을 유한성에서 구할지는 몰라도 지루함에서 구해줄 것 같지는 않다.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크게 세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범죄, 창조, 자살이 그것이다. 먼저 ‘범죄’는 산문적 삶 속에 인위적으로 영웅적(?) 서사를 도입한다. ‘예술’은 창작을 통해 삶에 시적 리듬을 부여해 그것의 지루함을 견디게 해준다. ‘자살’은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으로, 삶이라는 지루한 산문에 그냥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길은 서로 합류할 수도 있다. 가령 총기 살인범들은 대개 범죄를 자살로 마감하고, 연쇄 살인범들은 종종 범죄를 예술로 착각하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는 자살을 일종의 예술로 연출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웅적인 것은 이 절대적 지루함을 분과 초 단위까지 충만하게 견뎌내는 인내심에 있지 않을까? 어느 에세이에 나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이 혹시 답이 될지 모르겠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이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