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급기야 '컬러바'까지 등장했다. 다음에는 뭘까.
'생방송 드라마'에 대한 한국 방송계의 '안전 불감증'이 더는 봐주기 힘든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들어 지상파 TV 드라마에서 잇달아 대형 방송 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청자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 이 같은 방송사고는 시청자에 대한 큰 무례로, 공공의 재산인 전파에 대한 방송인들의 책임의식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생방송 드라마'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찍어야하는 드라마가 마치 생방송 프로그램처럼 사고의 위험을 안고 급박하게 제작되는 한국 드라마의 제작상황을 지칭하는 용어다. 관계자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이지만 '생방송 드라마'는 국내에서 버젓이,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촬영 못 해 결방..'컬러바'까지 등장 = 올해 들어 SBS에서 방송된 3편의 드라마가 방송사고를 냈다. 공교롭게도 모두 인기 화제작이었다.
'싸인'은 지난 10일 마지막회에서 화면조정용 컬러바가 난데없이 등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연출했고, 엔딩 장면에서는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편집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후반 20여 분은 음향과 음악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날 '싸인'의 시청률은 자체 최고인 25.5%였다. 그러나 그 완성도는 한마디로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사고 이유는 방송 1시간 전까지 촬영이 진행돼 편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오디오는 대사, 음악, 음향 등 4개 채널로 녹음한 것을 믹싱해서 이뤄지는데 문제가 된 후반 20여 분의 장면은 오디오 믹싱을 할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컬러바가 뜬 것도 편집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테나 : 전쟁의 여신'은 아예 촬영분이 모자라 1월25일 한회 방송이 결방됐다. 주인공 정우성의 부상으로 벌어진 일인데, 그의 부상 다음날 당장 방송이 펑크난 것이다. 이에 SBS는 부랴부랴 메이킹영상으로 '아테나 스페셜'을 만들어 대체편성했다.
정우성은 겨우 하루 촬영을 중단했지만 그로 인해 드라마가 방송이 안됐다는 것은 '아테나 : 전쟁의 여신'이 늘 방송 펑크의 위험을 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 최고의 화제작인 '시크릿 가든'도 지난 1월16일 마지막회에서 스태프의 음성이 삽입된 콘서트 장면을 그대로 내보냈다. 역시 시간에 쫓겨 편집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지난달 24일 막을 내린 MBC '마이 프린세스'도 마지막회 방송 4시간 전까지 촬영을 하는 바람에 주인공들의 결혼식을 담은 에필로그를 찍지 못해 어정쩡한 마무리를 했고, 지난해 11월2일 끝난 KBS 2TV '성균관 스캔들'도 방송 내내 촬영시간 부족으로 중반 이후 극중 낮과 밤이 뒤섞이는 비논리적인 상황이 뻔뻔스럽게 이어지더니 마지막회에서도 허둥지둥 마무리를 해 시청자의 거센 비난을 샀다.
그에 앞서 2009년 12월 시청률 39.9%로 막을 내린 KBS '아이리스'도 시간 부족에 후반으로 갈수록 내용이 엉성해졌고, 2008년 SBS '바람의 화원'은 문근영의 부상으로 두 회를 결방해야했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무리한 제작환경 개선 안 돼 = 이 같은 방송사고는 사실 드라마업계에서 '폭탄돌리기'로 인식된다. 몇몇 연속극을 빼고는 거의 모든 작품이 방송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고는 늘 예고돼 있고, 누구나 그 사고의 원인제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방송사나 제작사는 무리한 제작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16부작 미니시리즈의 경우 대부분의 작품이 기껏해야 대본은 1-4회, 촬영은 1-2회 분량을 마친 상황에서 방송을 시작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상황이 어긋나면 방송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방송사의 과도한 시청률 경쟁이 이런 상황을 야기한다고 입을 모은다. 드라마가 방송의 꽃이자 채널 이미지를 선도하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트렌드와 시청자의 반응을 수시로 스토리에 반영해 시청률을 잡아야하고, 이 때문에 장기적 계획을 세우거나 사전 제작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변석개의 대본 수정, 3개월 앞을 내다보기 힘든 편성 변경 등이 '생방송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
KBS 드라마국의 이응진 전문위원은 13일 "방송사의 책임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다"며 "사전에 대본이 절반 이상 확보되지 않으면 편성을 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기준을 적용해 외주제작관리를 엄격하게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해 이런 사고들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창식 드라마제작사협회 부회장은 "방송사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시청자의 눈높이는 할리우드를 지향하는데, 우리는 생방송 드라마를 만들며 사고를 내니 참 답답하다"며 개탄했다.
그는 "이건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드라마 제작시스템의 문제"라며 "이 작은 나라에서 오로지 시청률만 보고 과당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이런 사고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싸인'의 최문석 SBS CP는 특히 한국 드라마가 회당 72분59초씩 방송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해외 드라마는 회당 40-50분 분량이다.
최 CP는 "매주 72분짜리 드라마 두 편을 만드는 것은 영화 한 편을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시청률 경쟁 때문에 회당 방송 시간이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72분59초까지 이르렀는데 감당하기 힘든 분량이다"고 밝혔다.
그는 "쪽대본에 대한 문제제기는 식상한 것 아니냐"며 "대본 지연의 문제도 크지만 방송 시간을 늘려 시청률을 조금이라도 더 잡으려는 방송사들의 무리한 경쟁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제작 정착해야.."한류 드라마 품격관리해야할 때" = '싸인'의 주인공 박신양은 마지막회가 방송되기 2시간 전 트위터에 "'싸인', 마지막 1신을 남겨두고 있습니다"는 글을 남겼다.
한류스타인 그의 트위터는 해외 팬들도 많이 보는데 그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한류 드라마는 세계로 뻗어가지만 그 제작과정은 '하류'인 것이다.
'생방송 드라마'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국 드라마의 사전제작 시스템이 정착돼야한다. 문제는 드라마업계 모두가 이에 공감하면서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더이상 미룰 수 없다.
박창식 부회장은 "사전제작제를 빨리 도입, 정착시켜야한다. 전회를 사전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최소한 반이라도 사전에 만들어놓고 들어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방송사가 방송 석달 전에야 제작사에 편성을 결정해주는 상황에서는 방송 사고를 막을 수 없다"며 "편성을 조금 더 일찍 확정해주면 사전제작은 저절로 안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응진 전문위원도 "한국이 드라마에서 아시아 맹주 자리에 오른 상황에서 이제는 시청률이 아니라 품격을 관리해야한다"며 "빨리 제작 시스템의 선진화를 이뤄야한다"고 밝혔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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