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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왔죠">
2011-03-13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만약 귀신이 있다면, 귀신이 나를 영화판에 끌어다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는 내 삶이고, 체험의 누적입니다.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임권택(75) 감독은 13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임 감독은 '천년학'(2006)까지 100편의 영화를 남겼다.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가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찍은 작품이다. 수십 편을 함께 해 온 정일성 촬영감독이 아닌 젊은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임 감독은 "'달빛 길어올리기'는 전작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영화였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임 감독과의 일문일답.

--요즘 병원에 다니신다고 들었다. 몸은 어떠한가.

▲영화 찍을 때는 악으로 버텼다. 강행군을 하면 젊은 스태프들이 감독은 안 아프냐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영화를 찍을 때는 잘 버텼는데 역시 나는 중고차다. 영화를 완성해놓으니 아프더라. 물론 영화에 대한 초조함도 있었다.

--100편 넘게 영화를 찍었는데 아직도 초조한가.

▲100편을 찍었지만, 매번 흥행이 될지 안될지 초조하다. 가령 판소리 영화(서편제)같은 경우는 도무지 그 흥행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전통적 소재인 한지를 다룬) 이번 영화도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화가 전작들과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작들과는 다른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나는 만족하지만,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영화였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다.

임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전작들과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템포도 기존 영화들에 비해 빨라졌다.

영화의 화두는 한지. 한지 소개에 공감한 전주시와 전주국제영화제가 순제작비의 60%를 지원했다. 이 때문인지 한지를 다루는 '역사스페셜' 같은 다큐멘터리가 등장하고 다양한 한지 공예품들, 화선지와 한지의 차이 등 한지를 소개하는 부분이 영화의 한 축을 차지한다.

--정일성 촬영감독 없이 찍은 첫 디지털 영화인데.

▲필름으로 찍었다면 정일성 감독과 찍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디지털이 주는 화질이 단순하고, 심도도 전혀 없었다. 지금 많이 좋아졌다 해도 의심은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 국내에서 가장 큰 필름현상소가 4-5년 안에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몇 살까지 영화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남들이 만드는 걸 구경이나 하면서 노년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더라. '디지털을 적극적으로 알아봐야겠다' '체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디지털로 영화를 찍어보니 어땠나.

▲노출 등 구체적인 분야는 촬영감독에게 맡겼다. 나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작품의 화질 등 굵직굵직한 것만 정했다. 기본적으로 필름이나 디지털은 같은 것 같다. 디지털 화질은 생각했던 것보다 좋더라.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해이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디지털은 추가비용 없이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름으로 찍으면 NG를 낼 때마다 돈이 들어간다. 촬영현장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형식은 새로운데, 배우들은 옛날에 호흡을 맞췄던 연기자들이 더러 있다. 강수연과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이후 22년 만에 호흡을 맞췄는데.

▲마흔이 넘은 강수연 양(임 감독은 강수연 씨가 아닌 강수연 양이라고 표현했다.)은 배우로서 매력이 있을 텐데, 그러한 매력이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강수연과는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함께 했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한 배우와의 호흡은 편했나.

▲편함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이가 주는 '어떤 것'들이 있다. 나도 나이가 들었고, 강수연도 이제 40대다. 20대에 들여다보는 삶과 40대가 들여다보는 삶은 아마 다를 것이다. 나이가 주는 무언가가 있다. 나도 이만큼의 나이를 먹으면서 나이에 걸맞은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80살을 바라보는 내가 젊은 감독들의 스타일을 절대 흉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젊은 사람들도 나처럼 나이가 새겨진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삶이고, 체험의 누적이다.

--강수연이나 박중훈 같은 프로 연기자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호흡을 맞췄다.

▲박중훈이나 강수연은 연기에 일가를 이룬 달인들이다. 그런데 (연기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생활인과 맞부딪혔을 때 조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매우 이상한 영화가 될 게 뻔했다. 연기자들은 그런 생활인들과의 연기를 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기를 조절했야했다. (실제 일상사에서 나눈 생활인들의 대화들을 영화에 쓰면서) 생활인들도 촬영 중에 자신들의 '흥'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른 것 같다.

--박중훈 등 주연배우들에게 어떤 주문을 했나.

▲박중훈은 그동안 코믹과 액션장르에서 그의 캐릭터를 구축해놓은 게 있다. 예지원은 명랑하고, 발랄한 연기를 해왔다. 나는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 주길 원했고, 본인들도 그 같은 연기를 하길 원했다.

영화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 보관본을 전통 한지로 복원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한지를 영화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한지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많았다. 심지어 촬영이 끝난 시점에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도 모두 새로운 이야기였다. 임 감독은 섣불리 한지라는 광활한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것에 후회했지만 '한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영화화하는 것도 가치 있는 도전이라 판단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거나 말씀을 듣다 보면 한지전도사가 다 된 것 같다.

▲중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선지가 세계 시장에서 팔린다. 일본에는 화지가 있다. 그리고 몇 해 전만 해도 우리의 한지를 일본에 수출하면 일본인들은 그걸 가공해서 자신의 종이라고 해서 팔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것도 안 한다. 세계에서 종이의 질이 가장 좋은 한지는 이제 존재감이 없다. 딱하기도 하다. 예로부터 좋았던 것들을 우리가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달빛 길어올리기'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는가.

▲'타이틀'이라도 좀 좋아야지, '한지'라고 제목을 지으면 누가 영화관에 기웃거리겠나.(웃음) 이웃에 사는 카피라이터 이만재 선생이 지어준 거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 있는 '한지'의 품성과 잘 맞는 것 같더라. 시정(詩情)도 있어 보이고, 우리 영화의 정서적 측면과 제목이 맞아 보였다.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도 달이 나온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등장해 달빛 아래 서 함께 한지를 만든다.

▲실제로 천 년 가는 종이를 만든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은 종이에 미친 사람들이 가상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다. 저 사람들이 천연종이를 결국 만들어내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저 미친 사람들이 그 좋다는 종이 안으로 깊이 미쳐가고 있었구나', 그런 미침과 달밤의 분위기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영화가 읽혔으면 좋겠다.

--부인 등 가족들도 영화에 등장하는데.

▲원래는 현장에 잘 안 내려오는데, 내 몸이 안 좋으니 부인이 현장에 왔다. 어느 날 서울서 연기자들이 내려와야 하는데 펑크를 냈다. 연출부 친구들이 사모님이 때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연출부 친구들이 장난을 쳤는지도 모르겠다.(웃음) 배우가 되려는 아들에게는 '니 아버지가 도와줄 길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들이라고 내 영화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면 영화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배우가 될 녀석인지 아닌지 조금이라도 점검을 해봐야 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두렵지 않았나.

▲100번이나 해온 틀 안에서 허우적되면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 100편이 다 잘 된 것도 아니다. 작은 성과를 냈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다. 100편을 했음에도 아직 살아남았다. 뭔가 크게 저질러 시행착오를 한다고 해도 영화할 기회를 주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웃음)

--지난 50년간 영화를 했다. 후회되는 점은 없나.

▲나는 진짜 운이 좋은 놈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영화 제작하시는 분들과 인연이 닿아 이 일을 시작했다. 이 일을 하면 밥은 먹고 살겠지라는 생각으로 영화에 투신했다. 영화를 본 적도 없으니 영화에 대한 꿈이 있을 리 없다. 순전히 생업으로 하기 시작한 건데, 결국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직업과 만난 셈이 된 거다. 만약 귀신이 있다면 귀신이 나를 영화판에 끌어다 놓은 것 같다.

--영화를 하면서 소중했던 점은.

▲우리 사모님(배우 채령)을 만난 게 소중한 경험이었다.(웃음) 나는 이전에 영화감독보다 술꾼으로 더 유명했다. 결혼으로 술을 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며 살 수 있었다. 오로지 영화 속에 빠져서 살 수 있게끔 해준 부인께 고맙다.

--101편의 작품 중 의미 있는 작품은. 그리고 102번째 작품 계획은.

▲연출자로서 고를 수는 없다. 다만, 객관적으로 드러난 성과 면에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진출한 '만다라', 판소리를 알리게 해 준 '서편제', 칸 영화제에서 상(감독상)을 받은 '취화선'을 꼽을 수 있겠다. 102번째 작품은 구체적으로 아직 정해진 게 없다.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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