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40년 넘게 연기를 했습니다. 오래됐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40년을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출연한 여배우 강수연(45)의 말이다.
갑작스럽게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강수연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 도중 "눈이 오네, 눈이 와"라며 소녀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강수연의 스크린 복귀는 4년 만이다. 2007년 전수일 감독의 '검은 땅의 소녀와'에 특별 출연한 게 마지막이다. 주연급 출연은 박승배 감독의 '써클'(2003) 이후 8년 만이다.
그가 출연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다. 강수연은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 민지원으로 나온다. 고집스럽고 집념이 강한 인물로, 극중 한필용(박중훈)과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이다.
"고생도 많이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죠. 상황은 힘들었는데, 현장은 즐거웠어요. 거의 놀러 가는 분위기였죠. 하지만, 감독님을 보면서 배운 게 많은 작품입니다."
오래전부터 호흡을 맞춰온 옛 동료와 함께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이후 임권택 감독과는 22년만에 호흡을 맞췄고, 동갑내기 박중훈과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이후 주연으로는 24년 만에 함께 연기했다.
"그분들은 20여 년을 영화적인 동료로 지내왔기 때문에 절대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뭘 잘못해도, 혹은 상대방이 무얼 잘못해도 서로 감싸줄 수 있는 동료죠. 불편한 것보다는 편안한 게 더 많았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평소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분이다. 박중훈은 20여 년간 영화 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 온 몇 안 되는 친구다. 촬영을 하면서 어색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박중훈 씨를 라이벌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오랫동안 자기의 영화를 서로 해왔고, 서로의 영역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사이입니다. 오래된 동료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더 오래 만날 동료이기도 하죠."
22년 만에 작품으로 만난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거장"이라고 누차 강조하면서 "영화를 너무 잘 만드신다. 정말 오래 사셔야 한다"고 했다.
"저 연륜에도 자기가 가진 걸 버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시고,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시는 걸 보고 참 느낀 점이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거장이라고 얘기하는구나' '저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임 감독은 수십 편의 작품을 함께 작업한 정일성 촬영감독 없이 이번 영화를 찍었다. 처음으로 필름대신 디지털로 촬영했다. 극중에 다큐멘터리를 도입했으며 멜로드라마와 코미디를 담담하게 교차시키는 노련한 연출력도 선보였다.
강수연은 "감독님은 내가 아는 어떤 영화인보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다. 그냥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그만큼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것에 대해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화 관계 일들이 많아 촬영할 때보다 더 바빴다"고 했다. 그러면서 "20대부터 시작한 배우라면 조바심도 날 법하지만, 나는 아역부터 수많은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초조함이 없었다"고 했다.
사실 강수연은 40여년을 큰 쉼표 없이 연기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같은 풋풋한 청춘물부터 '경마장 가는 길'(1991) 같은 성인물, '베를린 리포트'(1991) 같은 사회적 영화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3대 국제영화제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씨받이)을 받았다.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아제 아제 바라아제)을 수상했다. 팬들과 영화관계자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
"작품으로 상을 받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한 작품이 잘된다고 다음 작품도 잘되지는 않잖아요.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에서는 벌거벗고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상을 받은 게) 개인적으로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대치라는 게 있잖아요. 사실 저는 그 기대치만큼 가기가 버거웠어요. 큰 부담이었고, 그런 부담은 여전해요."
그의 말처럼 부담감을 털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세월은 그를 허투루 통과시키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어려서 봐주고 몰라서 봐주고 미숙해서 봐주고 예뻐서 봐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봐주는 시간은 다 지나갔습니다. 연기를 더 오래하려면 지금이 예전보다 더욱 중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생물학적인 아름다움으로 승부할 나이는 지났다"고 말하는 강수연은 이제 80-90살까지 연기할 수 있는 '멀고 먼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좋은 배우로 남으려면 제가 살 길을 찾아야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깨달은 바가 있어요. 관객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싶습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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