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사진의 본질로 여겨졌던 특성을 위협한다. 바로 피사체의 존재다. 손으로 그린 형상은 꼭 실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화가가 펼치는 상상의 산물일 수 있다. 사진의 이미지는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일단 사진에 찍혔다면, 그 무언가가 그 언젠가 그 장소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법정에서 사진은 증거로 인정돼도, 그림은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은 사진과 그림의 구별을 무너뜨렸다. 앞으로 사진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거다.
사진의 푼크툼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punctum)을 사진의 가장 중요한 효과로 들었다. 푼크툼이란 (흔히 ‘필이 꽂힌다’고 할 때처럼) 사진 속의 이미지가 우리를 찌르는 어떤 촉각적 효과를 가리킨다. 바르트는 이를 ‘스투디움’(studium)에 대립시킨다. 스투디움이 사진의 의미를 읽게 해주는 어떤 관습적 코드라면 푼크툼은 일체의 해석의 코드를 전복하며 우리를 엄습하는 일종의 사건이란다. 사실 같은 메시지를 던지더라도 어떤 사진은 아무 감흥도 주지 않는 반면, 어떤 것은 이유없이 눈을 잡아끌지 않던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코드의 바깥에서 우리를 찌르고, 마음을 찢고, 때로는 전율에 떨게 하는 ‘사물’이다. 다시 말해 사진은 뭔가를 재현하는 그림(icon)도 아니고, 뭔가를 전달하는 문서(symbol)도 아니며, 그저 존재했던 어떤 것의 흔적(index)일 뿐이다. 그것은 거기에 있었고, 거기에 있었기에 빛을 반사했고, 그 빛이 렌즈를 통해 모여져 필름에 발린 감광물질에 반응을 일으킨 것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물, 가령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같은 것이다.
푼크툼은 이 피사체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하지만 디지털은 사진의 이 본질적 측면을 위협한다. 가령 디지털 사진은 픽셀로 이루어져 있고, 가공도 픽셀의 수준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사물의 생성단위와 존재단위가 일치할 때 조작은 완벽해진다. 디지털 이미지의 경우, 그것이 과연 존재했던 것의 재현인지, 아니면 존재한 적 없는 것의 상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것은 굳이 피사체를 요구하지도,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없다면, 당연히 푼크툼도 없어야 할 거다.
디지털 사진의 푼크툼
하지만 디지털 사진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푼크툼’이라 부를 만한 촉각적 효과를 경험한다. 그것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미국의 평론가 할 포스터가 초현실주의 예술의 특징으로 들었던 ‘언캐니의 푼크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령 디지털은 존재하지 않은 것에까지 사진의 생생함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낡은 시각적 관습에 따라 여전히 사진 속의 피사체가 정말로 실존했던 것이라 믿는다.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는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한다는, 미묘한 중의성을 띠게 된다.
디지털 사진은 실재했던 것처럼 보이나 실제론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의 이미지다. 이처럼 존재하면서 부재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유령을 닮았다. 유령이 오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출몰하기 때문이리라. 유령이란 결국 죽은 자가 살아서 움직이는 현상이 아닌가? 독일의 심리학자 옌취는 이렇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한 대상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을 ‘언캐니’(unheimlich)라 불렀다. 그 느낌이 알고 싶은가? 그럼 마네킹으로 가득 찬 방에서 혼자 밤을 보내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그것을 ‘푼크툼’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디지털 사진에도 분명히 우리를 엄습하고 압도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피사체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리라. 디지털 이미지에서 피사체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대상에서 느껴지는 어떤 섬뜩함과 관련이 있을 거다. 할 포스터의 표현대로, 디지털 이미지의 효과는 ‘언캐니’의 푼크툼이다.
키스 커팅햄의 사진은 언뜻 보면 전형적인 스튜디오 초상처럼 보인다. 검은 배경에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서 있는 인물은 어떻게 보면 예쁘게 생긴 소년으로, 어떻게 보면 아직 성숙이 덜된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인물은 실존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소묘와 소조로 먼저 프레임을 뜨고, 그 위에 여러 인물을 찍은 사진을 스킨으로 입혀 만들어낸 가공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흔히 그의 사진에는 “무서운 아름다움”(frightening beauty)이 있다고들 말한다. 한마디로 언캐니의 아름다움이라는 얘기다.
낸시 버슨이라는 작가는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의 사진을 합성하여 독재자의 초상을 만들어냈다. 일본 작가 기타노 겐은 특정 커뮤니티 성원들의 사진을 찍은 뒤 그 필름들을 겹쳐 인화한다. 그 효과는 매우 으스스하여 마치 어둠 속에 유령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국 작가 크리스 돌리 브라운은 특정 연령대에 속하는 한 마을의 여성들의 사진을 찍은 뒤 컴퓨터를 사용해 그것을 하나의 초상으로 종합했다. 2천명의 얼굴이 겹쳐지는 곳에 나타난 인물은 마치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다.
독일 작가 로레타 룩스의 모델은 친구나 이웃의 아이들이다. 그는 이 아이들을 찍은 뒤 컴퓨터를 이용해 아이들을 자신이 손으로 그린 배경 속에 배치시킨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포토숍을 통해 실제보다 눈이 크게 묘사되는 바람에 인형인지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디자이너 출신인 러시아 작가 알렉 도우는 주로 패션모델들을 대상으로 작업을 한다. 카메라로 찍은 모델들은 포토숍을 이용한 조작을 통해 거의 마네킹처럼 보인다. 인형과 마네킹은 언캐니 효과를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찾던 재료였다.
초상의 죽음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의 예로 든 사진들은 대개 초상 사진이었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초상의 본질은 인물의 외면을 통해 그의 영혼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디지털의 초상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 인물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서 ‘초상의 죽음’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의 초상은 한마디로 ‘죽은 초상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초상에도 여전히 푼크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언캐니에서 나올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언캐니란 ‘억압된 것의 회귀’와 관련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생물과 무생물, 유기체와 무기체, 삶과 죽음의 구별을 몰랐기 때문에, 태어난 이후에도 그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 욕망(‘사의 충동’)을 갖고 있다. 삶의 한복판에서 그 억압된 욕망을 연상시키는 대상이나 현상을 볼 때, 인간은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무의식을 해방시키려 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언캐니 효과에 집착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디지털과 더불어 초현실주의가 되돌아온 것일까? 영혼 없는 초상, 무기물을 닮은 얼굴의 섬뜩한 아름다움(“무기물의 섹스 어필”?)은 이미 패션, 광고, 영화 시장에서 대중의 취향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의 언캐니의 미학이 20세기 초처럼 전복적, 해방적 기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욕망은 더이상 억압되지 않는다. 외려 시장에서 기술과 자본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