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골목길로 이운 달빛이 스며든다. 달빛을 타고 흐르는 필용(박중훈)의 어깨가 비스듬히 처져 있다. 뚜벅뚜벅, 필용은 뇌경색으로 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내 효경(예지원)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걸어간다. 세숫대야에 뜬 보름달만이 그의 비루한 삶을 밝게 비춘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는 생활인의 곤궁함이 묻어난다. 승진 한 번 해보고자 맹렬히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필용이나, 지원금을 한 푼이라도 더 타려는 한지 제작업자들의 얼굴에는 추레함이 뒤섞인 어떤 결연함마저 엿보인다.
공무원 필용은 자신의 바람 때문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아내를 돌보며 살아간다. 직장에서는 고교 때 자신보다 공부도 못했지만, 지금은 시청 과장인 동창 밑에서 굽실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안팎으로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필용은 5급 사무관이라도 되고자 이를 악문다. 때마침 기회가 찾아온다. 시청에서 한지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자 그는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한지과로 전과한다.
필용은 일에 매진한다. 밤늦게까지 일한 탓에 코피까지 쏟는다. 늦은 귀가를 의심한 아내 효경은 또다시 바람피우느냐며 잔소리를 한다. 한지 찍는 과정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은 한지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캐려 한다.
좀 더 긍정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없느냐며 지원과 사사건건 부딪히던 필용.
하지만, 미운정도 오래 들면 뿌리치기 어려운 게 인간사.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이들은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난 뒤 술을 함께 마신 후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75살, 임권택 감독의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수십 편을 함께 작업한 정일성 촬영감독 없이 도전한 영화이자 그의 첫 디지털 영화다.
영화의 화두는 한지. 한지 소개에 공감한 전주시와 전주국제영화제가 순제작비의 60%를 지원했다. 이 때문인지 한지를 다루는 '역사스페셜' 같은 다큐멘터리가 등장하고 다양한 한지 공예품들, 화선지와 한지의 차이 등 한지를 소개하는 부분이 영화의 한 축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는 극 영화만 100편을 만든 숙련공이다. "옛 한지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가는, 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처럼 임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루한 일상을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엮어가며 118분간 지루할 틈 없이 엮어간다.
배우들의 호연도 큰 몫을 차지한다. 박중훈의 가벼운 연기는 극 초반, 영화의 묵직한 흐름과 다소 엇박자를 내는 듯 보이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극과 찰싹 달라붙는다. 하는 듯 마는 듯한 그의 코미디는 곱씹으면 더욱 웃긴다. 특히 술 주정 후 벌을 서는 장면이라든가 아내에게 혼나는 장면은 매우 웃긴다.
냉철하면서도 때로는 열망이 뒤섞인 강렬한 눈빛을 선보이는 강수연의 연기도 눈길을 사로잡으며, 말을 더듬고 다리를 절면서도 남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예지원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특히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박중훈-강수연의 연기 호흡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까운 듯 먼 필용과 지원의 로맨스는 극에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림 같은 화면은 역시 압권이다. 필용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장면이라든가 달밤에 계곡에서 한지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법하다.
한국영화 최초로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CJ엔터테인먼트 등 3대 투자배급사가 각각 투자, 배급, 마케팅을 담당하며 지원사격에 나선다. 총제작비는 25억원이다.
3월17일 개봉. 15세이상관람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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