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동(1916∼95)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서 생애를 마친 영화인이다. 한국에서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36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공모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열여덟살인 1934년에 이미 조선중앙일보를 통해 문학가로서 등단했던 최금동은 이 공모전에 <환무곡>을 출품하여 당선됨으로써 스무살의 나이에 시나리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작품은 당시 이효석의 각색을 거쳐 김유영 감독에 의해 <애련송>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37년부터는 조선사람들의 정상적인 영화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이므로 최금동 역시 영화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해방 후에 <새로운 맹서>(1947, 감독 신경균)의 각본을 맡음으로써 다시 영화계에 복귀하였다. 그가 쓴 시나리오는 <아, 백범 김구 선생>(1960, 감독 전창근), <성웅 이순신>(1971, 감독 이규웅) 등 주로 민족주의적 영웅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대까지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영화화된 마지막 시나리오는 1986년작 <중광의 허튼소리>(감독 김수용)다.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실명상태였고 병으로 인한 신체적 장애, 어려운 가정형편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최금동은 <그대 젊었을 때>와 <미완성 교향곡>을 보고 영화라는 매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시나리오 작가와 사회부 기자라는 두 가지 직업에서 사회 비판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고지식한 삶을 살았다.
“작가로서 자기 세계를 고수하지 않고는 작품다운 작품을 쓸 수 없다”며 현실과의 안이한 타협을 경고하는 이 인터뷰에서, 불행한 시대와 가혹한 운명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고독하며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어떤 예술가의 생애에 대한 낮고 조용한 회고를 들을 수 있다.
한쪽 눈은 실명, 한쪽 눈은 백내장
먼저 서두에 말해야 할 것은, 우선 내 자신이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공적이 된다거나 특기가 된다거나 자기가 자부할 만한, 또 다른 사람에게도 말해서 과히 부끄럽지 않을 만한 그런 세월들이랄까 업적들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면 참 좋겠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사실 없어요.
먼저 육체적으로, 눈 하나를 나서부터 실명했어요. 그것이 바른편의 눈이죠. 한쪽 눈만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다섯살 때에 또 백내장에 걸려가지고. 부모님들이 더 금방 종합병원 큰 안과 같은 데 갔더라면 고칠 수 있었는데, 그때의 환경은 시골서 가난에 찌들린 살림인데다가 무지했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했어요. 그저 그냥 원시적인 치료방법만 가지고 하다가 스물한살까지 남 앞에 서서 얼굴을 못 들었어요. 그 백내장 때문에. 이렇게 쳐다보면 병신, 불구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니까 학교 댕길 때도, 안 댕길 때도 친구가 없다 이거예요. 애꾸눈이다 해가지고 놀림을 받으니까. 그래서 보통학교 6년도 그랬구, 그 다음에 서울 올라와서 고학을 하면서 지금의 동국대학(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필자)을 다니면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항상 위축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스물한살 때 취직이 됐어요. 첫 출근하기 전에 ‘이건 안 되겠다’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수술을 했어요. 그게 또 완전 어리둥실하게, 수술은 못하고 염색을 했어요. 동공만을 가리지 않도록 염색을 해가지고 지금 현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염색 속에는 백내장이 그대로 있고 실은 이 시력마저도 하나만 가지고 쭉 쓰니까 보통사람의 눈의 이분지 일도 안 돼요. 안경을 쓰고 있지마는,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내 얼굴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 쓴 것이지, 시력을 돕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에요. 난시, 근시, 원시까지 있기 때문에 안경점에 가서 시력을 맞출 수가 없어요.
둘째는, 그 보학(지라가 붓는 병인 복학으로 생각됨- 필자)이라고 있죠? 요새는 고치기가 쉬운데 어려서 거하게 앓아가지고 아홉살까지 앓았어요. 그래 그것에 부대끼니까 자꾸 열이 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불로 지지고, 바늘로 살을 꿰매고, 뱀 피고 뭐고 안 먹은 게 없어요. 원시적인 방법으로 치료했기 때문에 도저히 고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키도 크지 않고 발육이 안 되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써야겠는데, 시나리오라는 단어 해석도 못해
나는 전라남도 함평 대동면 상교리에서 낳았는데 함평읍에서 빤히 바라다봬요. 일육(1916)년 칠월 삼일에 낳았죠. 따지고보면 난 형제가 없어요. 형님이 한분 있다가 일곱살 때 돌아가셨죠. 그러니까 난 얼굴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아버지가 의병에 가담해가지구 쫓겨다니는 몸으로 집을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하루 밤에 나타나서는 이사를 가자고 해서 야반도주하다시피 가족들을 데리고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기슭으로 가셨어요. 대흥사 기슭이죠. 그때 형님이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그래 여기서 살면서 아버지는 또 그냥 가족만 남겨놓고 자꾸 피해댕기고. 그러시다가 결국은 거기에서 더 살 수가 없어서 일곱살 때 완도로 갑니다.
완도서 소년 시절을 살았죠. 그중에 본도가 굽어다보이는 신지도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 신지도에서는 학교에 독립운동하는 교원들이 많았죠. 그래가지고 늘 잽혀가요. 우리 앞에서도 늘 묶여가요. “공부들 잘해라. 실망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 돼라” 하고 말 한마디 남기고는 포승 끼고 묶여가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데, 성적은 늘 첫째 둘째를 다투었어요. 근데 내가 제일 싫은 것은 수학이었죠. 그외의 것은 전부 백점을 받았어요. 그래서 3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내가 급장을 했습니다. 신체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성적이 좋고 그러니까 학교 선생은 귀여워해서.
그리고 그때도 작문시간이란 것이 있고 이야기시간이 있었어요. 그때는 아주 그냥, 내가 도맡아 했었어요. 그러니까 선생은 들어오지 않고 “그거 급장이 해라” 해버리면 내가 나가 있고. 나가서 시간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책을 많이 봐야겠더라구요. 그때 방정환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중학교도 역시 독립운동하는 투사, 지사들이 세운 학교예요. 인격적으로든지 학식으로든지 훌륭한 분들이 교편을 잡고 있어서 학생들한테 주는 영향이 상당히 컸습니다. 완도중학교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신지도에 간이 공립국민학교에서 월급을 받았어요. 거기 교장이 나더러 3학년을 맡아서 아는 데까지 지도를 해달라, 그래서 한쪽으로는 애들을 가르치면서 한쪽으로는 농사일도 돕고. 모도 심고 나무도 해 때고, 뭐 안 해본 거 없습니다. 일하면서 강의록을 틈틈이 봤죠.
18세 때 서울로 올라왔죠. 경성사범학교에 가면 감비생이 되어서 돈을 적게 들이고도 공부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선생 노릇을 할려구 갔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좀 무리였어요. 내가 신문배달하는 데 지국장과 같이 올라오게 되었는데, 내가 몹시 아팠어요. 서울에 도착하니까 멀미도 하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 다음날이 시험날이에요. 국어하구 역사하구였는데, 그것은 다 잘 치렀어요. 그 다음날은 시험 치고 와가지고는 혼수상태에 빠져서 일어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훈도(선생) 되는 길도 막혀버렸어요.
인제 훈도 될 꿈도 깨지고 미술 할 꿈도 깨지고, 만학이고 해서, 지름길을 가야겠다 하고 경성고등예비학교라는 데 들어갔어요. 거기가 3년 과정인데 단축했어요. 그동안 한번도 집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때부터 신문배달을 했죠. 그래가지구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 동국대학교의 전신- 필자)를 들어갔습니다.
그 즈음에 <그대 젊었을 때>라는 영화가 나왔어요. 음악영환데,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그 다음에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봤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아주 결정적인 어떤 모멘트를 줬어요. 음악이 저렇게 아름다운 건가! 어떻게 그렇게 감동을 받을 수가 있어요? 지금까지 소설을 읽고 책들도 보면서, 답서(答書)를 한다고 했는데도, 그렇게 감동을 받아본 일은 없었단 말이에요. 며칠을 두고 잠을 못 자요. 화면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그런 충격에 쭉 침전되었던 모양이에요. 그것이 불교전문학교 3학년 때일 겁니다. 그러니까 1936년이 될 거예요.
그때 동아일보에 ‘시나리오 문학창도를 위해서’, 타이틀이 그래요. 시나리오 문학창달을 위한 현상모집을 한다, 그러니 기성도 나오고 신인도 나오거라, 조건은 명승고적을 솜씨있게 엮어봐라, 조선의 명승고적을 솜씨있게 엮어 넣어서 드라마 시나리오를 만들어라. 그래서 현상금이 200원이에요. 지금(인터뷰를 하던 1960년대 말- 필자)으로 한 300만원 정도일 거예요.
근데 <기미 아까끼꼬>(그대 젊었을 때)하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서 받은 감동이 자꾸 꿈틀거려요. 썼으면 좋겠다 하는데, 시나리오라는 단어도 해석을 못하는데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때까지 시나리오 습작이라는 건 전연 없었을 때죠. 그런데 그때 안석영, 이익, 김정혁, 서광제 요렇게 네분이 ‘단막 시나리오란 이렇게 쓰는 거다’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한 5회 정도, 시나리오의 형태로 돌아가면서 연재했어요. 시나리오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뭐,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준 거예요.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shymoss@dreamwiz.com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