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영화 '만추'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최근 연합뉴스와 만나 한 말이다.
김태용 감독은 민규동 감독과 공동연출한 '여고괴담 2'(1999)로 장편 데뷔했다. 영화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은 두 번째 장편 '가족의 탄생'(2006)이다. 한 가족의 사연을 따뜻한 시각으로 그린 이 작품은 테살로니케영화제, 대종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만추'는 그의 세번째 장편영화다.
'만추'는 두 남녀가 함께한 3일의 기억을 담은 이야기다. 둘 사이의 사랑은 절절하기보다는 안개가 자욱이 깔린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담담하게 펼쳐진다.
"사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랑은 별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사회생활, 사람들과의 관계 등 중요한 가치들이 여럿 있죠. 그런 점에서 '만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현실적입니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사랑에 목매고 있기 때문이죠. 옥자는 훈에게, 옥자의 남편은 옥자에게, 애나의 전남편은 애나에게…. 주인공인 애나와 훈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절절하죠."
김태용 감독의 관심은 그런 절절한 사랑에 있지 않았다. 환희와 고통의 기억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사랑은 영화에서 주로 대사로만 전달된다. 애나와 애나의 전 남자친구 왕징의 사연, 옥자 남편과 옥자의 이야기가 그렇다.
김 감독은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남녀가 서로에 대해 끌리는 순간, 사랑이 시작되려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은 채 묵묵히 기다리는 정서, 그리고 그 정서에서 파생하는 에너지를 화면에 담아보고 싶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에너지가 더욱 큰 것 같아요. 역설적이지만 더욱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고 할까요? 역동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한 여자가 기다리는 느낌을 가질 때, 어떤 힘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어요."
'만추'는 한국 로맨스 영화를 대표하는 고전이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 이래로 김기영 감독은 1975년 '육체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김수용 감독이 1981년 '만추'라는 동명 타이틀로 이 영화를 재해석했다.
이주익 보람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김 감독은 고사했다고 한다. 리메이크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고사했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만추'의 이야기가 떠나가지 않았어요.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람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 해외에서 찍으면 원작에서 가까워질까 멀어질까에 대한 궁금증도 컸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하기 시작했죠."
촬영지는 시애틀로 정했다. 일 년의 대부분을 비가 채우는 도시, 얼터너티브록 운동을 이끌었던 '너바나'의 싱어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도시, 이소룡의 무덤이 있는 이 도시가 주는 미묘한 느낌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배우는 매우 중요했다. 이만희 감독에 등장했던 문정숙 이래로 '만추'의 중심추가 늘 여성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탕웨이(湯唯)를 낙점했다.
"궁금했던 배우인데, 작업을 하면서 무언가 힘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사에 당당한 느낌이 들면서도 속은 여린, 그리고 굉장히 섬세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추'를 촬영했던 문정숙, 김지미, 김혜자보다도 촬영 때를 기준으로 나이가 다소 어렸지만 성숙한 느낌은 그들에 못지않았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하거나 볼거리가 풍부하지는 않다. 대사마저도 많지 않다. 안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배우들의 옷깃을 여미는 동작 등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느끼는 마음의 흔적들을 쫓아가는 탓이다.
"'만추'는 언어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비언어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언어 이외의 소통에 관심이 많은 영화죠. 둘이 하루를 보낼 때 서로 나누는 감정은 무얼까 고민했죠. 말하지 않는 순간의 어떤 시간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김 감독은 "만추를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다음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으로서 얻는 게 있는 영화를 보면 좋아요. 그 정체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이 있어요. 지적인 자극, 정서적 자극…. 그 정체가 무언지는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준비를 안 했는데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이 있죠. 제가 만드는 영화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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