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1960-70년대가 청바지, 통기타로 대표된 포크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록 음악이 꽃핀 시대다.
그중 1985년은 록 음악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로 꼽힌다. '한국의 비틀스'로 불린 들국화의 1집 '행진'이 세상에 나온 해기 때문이다.
음악 전문가들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위'에 꼽은 이 음반이 발매된 지 지난해로 25년이 됐다. 이를 기념해 오는 4월에는 국카스텐, 못(MOT), 몽니 등 후배 밴드들이 참여한 리메이크 음반도 출시된다.
들국화의 등장은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음악 시장을 관통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22일 "들국화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시작"이라며 "젊은이들의 자유가 신음하던 군사 독재 시기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 곡들은 청춘의 폭발성과 함께 비주류 음악의 파괴력을 증명시켜줬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 흐드러지게 핀 들국화의 멤버들은 후배들에게 전설로 불리며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1992년 솔로 2집까지 낸 최성원(베이스)은 개봉을 앞둔 영화 '기타가 웃는다'의 주제곡 '사람의 풍경'을 불렀고, 미국 이민 생활을 접고 2009년 귀국한 조덕환(기타)은 지난달 첫 솔로 음반을 냈으며, 주찬권(드럼)은 엄인호, 최이철과 밴드 '수퍼 세션'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이들은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 해 초까지 들국화 재결성을 위해 뛰었다"는 조덕환은 "건강 문제로 요양 중인 보컬 전인권이 회복되면 세월이 흘러도 기다리는 팬들이 있을테니 우리 모두 다시 뭉칠 것을 소망한다"고 했다.
◇"'들국화 껌' 씹다 팀명 만들어" = 1980년대 초 이화여대 입구에 있던 포크가수 양병집의 음악카페 '모노'. 이곳에서 2인조로 공연하던 전인권과 허성욱(건반.1997년 별세)은 최성원에게 그룹 결성을 제의했다. 이들은 '모노 결의'를 통해 3인조로 출발했고 1983년 조덕환을 영입했다.
"모노에서 전인권이 음악을 같이하자고 해 어쿠스틱 기타를 치던 제가 일렉트릭 베이스를 사서 셋이 클럽 공연을 했어요. 이즈음 '따로 또 같이'의 콘서트에 게스트 초대를 받았는데 밴드 이름이 없었죠. 택시에서 제가 '들국화 껌'을 씹다가 '들국화가 어떻냐'고 제안했어요. 사실 껌 이름이라기보다 그때 전인권이 그룹 스카이라크의 '와일드 플라워(Wild Flower)'를 참 잘 불렀거든요."(최성욱, 이하 최)
"1978년 고려대 그룹 '고인돌'로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탄 후 고인돌 멤버 이영재와 '조이'란 듀엣을 할 때 전인권이 참여 제의를 했죠. 제가 합류했을 때는 최성원이 전인권과의 갈등으로 잠시 팀을 떠나있을 때였어요. 우린 삼청동 전인권의 집에서 전인권 의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연습했어요. 이때 전인권은 소리도 대단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의는 정말 존경스러웠죠. 동숭동 파랑새소극장 장기 공연부터 최성원이 다시 들어와 4인조로 이태원 클럽 '라이브'에서 공연했는데 정말 음악하는 맛이 났어요."(조덕환, 이하 조)
이들은 언더그라운드 무대를 기반으로 입소문을 탔다. 음반을 내기로 한 건 네 멤버의 의지였지만 1집을 제작한 동아기획 김영 사장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최성원은 "전인권이 음반을 낸 적이 있던 지구레코드로 가던 중 우연히 한 레코드점에 들렸다가 그 레코드점을 운영하던 김영 사장을 만났다"며 "계약금 2천만원에 봉고차 한대 값을 불렀는데 본인이 계약하겠다고 해 인연이 됐다"고 말했다.
1집 녹음에는 당시 그룹 '믿음 소망 사랑'으로 활동하던 주찬권과 최구희(기타)가 세션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조덕환이 1집 후 탈퇴하자 1986년 2집부터 정식 멤버로 영입됐다.
◇"혁신적인 음악, 청년 문화 분출구" = 1집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조덕환은 "서울에선 라이브 클럽 공연을 통해, 전국적으로는 몇번 출연한 라디오 덕택에 음반 발매 전 잠재적인 팬이 형성됐던 것 같다"며 "당시 TV에선 송골매, 산울림이 있었지만 우리 소리와는 달랐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찬권은 "당시 TV의 라이브 환경이 나빴고, 우린 장발이어서 TV에 출연하려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며 웃었다.
감성적인 통기타 문화를 경험한 이들에게 에너지 넘치는 들국화의 음악은 혁신적이었다.
"통기타 세대는 외국 음악을 비슷하게 따라하는 이미테이션 세대였죠. 그분들이 서구적인 문화를 즐기는 기반을 마련했다면, 우리는 팝송과 가요의 소비 비율이 8대 2던 시기에 이 비율을 바꿔놓았어요."(최)
조덕환은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운동권의 청년 문화가 형성됐는데 전인권의 포효하는 소리와 공감어린 노랫말이 민주화를 향한 스트레스를 푸는 분출구가 됐던 것 같다"고 거들었다.
당시 멤버 전원이 곡 작업에 참여하며 완벽한 밴드 구조를 보여줬다는 점도 새로웠다. 1집에서는 전인권이 '행진', 최성원이 '그것만이 내 세상'과 '매일 그대와', 조덕환이 '세계로 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을 작곡했다.
주찬권은 "곡을 써서 밴드 음악을 활동하는 팀이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했다.
"'세계로 가는 기차'는 88서울 올림픽을 기다리는 청년의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또 20대에 쓴 '축복합니다'는 외교관 영사로 출국하는 형을 멀리 떠나보내는 제 감성을 담은 곡이었죠."(조)
그러나 이들은 1987년 전인권과 허성욱이 대마초 파동에 휘말리며 휴식기에 접어들었고 1989년 '아듀, 들국화 고별콘서트'로 공식 해체됐다. 이후 1998년 재결성 공연도 했지만 이마저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양성 없는 지금 음악계는 비정상적" = 록이 소외당한 지금의 음악계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후회는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들국화 팬들에게는 죄송해요. 가장 먼저 팀을 나온데 대한 책임감도 좀 느끼고요."(조)
이들은 댄스, 힙합으로 쏠림 현상이 심화된 지금의 음악 시장을 향한 쓴소리도 한마디씩 했다.
최성원은 "과거에도 우린 사회, 미디어 등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음악을 했다"며 "전세계적으로 지금도 록이 주류인데 우리 음악 시장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이다. 한쪽으로 몰리고 다양성이 없는 건 글로벌한 상식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상황이다. 물론 한국의 특성에 맞게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고 말했다.
주찬권은 "우린 음악인으로 살아남아 생활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며 "먹고 사는 것에 시간을 쏟으니 40대 음악인은 전멸이다. 해외처럼 클럽 문화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고 거들었다.
록이 만개하기엔 여전히 척박한 환경이지만 이들 모두 다시 피어날 들국화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조덕환은 "최성원, 주찬권과 재결합 얘기를 끝낸 후 삼청동 전인권의 집에 10번이나 찾아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얘기를 나눴다"며 "하지만 전인권이 건강을 회복될 때까지는 각자 활동을 하며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최성원도 "예전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선 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며 "상황이 되면 다시 모여 골프치듯이 음악하고 싶다"고, 주찬권도 "마음속에 늘 가능성은 품고 있다"고 했다.
이들에게 들국화란?
"억지로 만들어낸 음악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 좋아했던 음악을 만들었던 좋은 그룹이었어요. 이제 그런 팀이 나올 때도 됐는데 나올 생각조차 못하는 게 신기하네요."(최)
"음악하는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고 좋아하는 팬들도 많았으니 음악인으로서 들국화와의 인연은 감사할 따름이죠."(주)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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