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동안 목요일은 안산으로 강의 나가는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의 가방 속에는 <씨네21>이 들어 있어서였다. 안산에서 우리집, 혹은 우리집에서 안산까지는 이러저러한 교통수단을 다 이용해야 갈 수 있고 올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나가 전철을 타고 한 시간을 간 다음 안산역에서 내려서는 다시 학교까지 택시를 타야 한단다. 집으로 오는 길 역시 다른 수단이 없으니 그 코스를 거슬러 올밖에. 책읽기 다음엔 영화보기를 즐기는 그는 <씨네21>을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읽는 모양이었다. 그가 사온 잡지를 읽어가다보니 나도 제법 <씨네21>을 즐겨 읽는 독자가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가 휴강했을 때에는 이번주엔 <씨네21>을 못 보겠군,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것도 인연인지 <씨네21>에서 청탁이 오면 내 분야가 아니어서 별로 할말도 없는데 사양을 못하고 미적거리다 글을 쓰게 되곤 했다. 내 몫은 이만큼일 것이다. 어느날 백은하 기자가 정기적으로 글을 써줄 것을 청했을 때 못한다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볼게요, 한 것은 순전히 함께 사는 사람 때문이다. 그는 올해도 여전히 일주일 중의 하루는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택시를 타고 안산을 오가야 할 것이고 전철 안에서 혹 내 글이 그에게 즐거움이 될까? 생각했던 것이다. 판단착오라고 느꼈을 적엔 이미 생각해볼게요, 를 해볼게요, 로 바꿔 대답한 뒤였다. 아이구, 내가 영화인도 아니고 어쩌자고… 뒤늦게 가슴을 치며 번복해봤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뜻밖에 <씨네21> 독자에게 염치없이 새해인사를 드린다. 백은하 기자는 영화이야기를 써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영화와 관련되어도 안 되어도 괜찮다며 자유롭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쓰면 된다고 했다. 어쨌거나 자기 분야에나 집중할 일이지 무슨 일이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파이란>의 장백지가 한글을 처음 배워서 편찰지에 대고 서툴게 강재씨… 이곳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중에서도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라고 쓰던 장면이 생각난다. 언젠가 <파이란>에 대한 이야기를 여럿이서 함께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울었다고 말해서였다. 저 남자들이 다 울었단 말인가? 나는 그중에서 특히 눈물 따윈 안 흘리게 생긴 사람을 몰래 물끄러미 응시하기도 했다. 나라고 안 울었겠는가. 처음 <파이란>이 상영되었을 때는 보지 못했다. 비디오를 빌려다가 어느날 자정이 지나 틀어놓고 소파에 앉았다. 처음엔 상찬이 대단하더니 뭐 저 정도 가지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무릎을 싸안고 앉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터지는데 걷잡을 길이 없었다. 지난 연말에 스타식스에서 재상영을 해서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는 역시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 비디오로 다시 봤으면 또 울지는 않았을 텐데 또 눈이 붓도록 울고 말았으니.
두 번째 보았을 땐 언어를 다루는 한 사람의 입장으로서 기이한 체험을 했다. 내가 쓰고 있는 언어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나? 갑자기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소설을 쓸 때 다 쓰고 난 뒤에 마지막 작업으로 혼자서 소리를 내어 소설의 문장을 읽어본다. 사이를 두지 않고 두번씩 쓴 언어를 골라내기 위해서다. 혀에 걸리는 언어, 닳아진 언어, 그 문장에 적당치 않은 언어들을 걸러내기 위해서이다. 가능하면 우리 모국어를 생명력 있고 유려하게 사용하고 싶은 게 비단 나만의 마음일까. 나도 그런 한 사람인데 파이란이 이강재에게 쓴 편지의 내용 앞에서 한순간 형언할 길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강재씨…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친절합니다, 라니. 이 얼마나 닳고 닳은 말인가. 만약 내가 썼다면 일차적으로 지우기 작업에 들어간 말들이다. 우리가 너무 사용하여 이제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일 뿐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언어가 느닷없이 황홀하게 신생하여 뒤퉁수를 치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언어, 그 말밖에 알지 못하니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여자가 쓴 편지는 그러므로 더욱 간절했다. 강재는 결국 오열을 터뜨린다. 서로 얼굴 한번 마주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하여 소통을 이룬 것이다. 결국 영화 속의 강재처럼 관객이 어깨를 들썩거리고 만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녀가 쓴 편지의 서툴고 간결한 문장 속에 배어 있는 간절함도 그 한몫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씨네21>과의 새로 시작된 이 글쓰기도 그와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경숙 I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