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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존재론에서 유령론으로

새 인터내셔널과 유령론

‘죽어서 격식을 갖춰 땅속에 묻힌 시체가 어찌하여 수의를 찢고 나타났다는 말이오? 그대를 편안히 모신 무덤이 어찌하여 그 무거운 대리석 입술을 벌려 시체를 뱉어놓았단 말이오? 그래, 그대 시체가 이렇게 다시 어스름한 달빛 아래 나타나서 이 밤을 이렇게 끔찍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이오? 아, 자연의 법칙에 묶여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풀지 못할 문제를 던지고,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곡절이 무엇이란 말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오?’

마르크스의 유령들

베를린장벽 붕괴 얼마 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여기서 ‘유령’은 물론 <공산당선언>의 그 유명한 구절과 관련이 있다.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舊)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이 유령을 내쫓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이 퇴마의식(exorcism)이 효험이 있었던 걸까? 실제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한동안 세계는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이 부르는 승전가로 요란했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마르크스의 정신은 미래에도 유령처럼 출몰하리라.’

물론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spectre)은 무덤에서 튀어나온 사령(死靈)이 아닐 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을 쓸 당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날아온 귀신이었다. 즉 그것은 과거에서 되돌아온(revenant)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서 도래할(a venir) 존재였다. 아직 실체는 없지만 분명히 현실의 층위 위에 얹혀서 아른거리는 어떤 형상. 존재하지도 않으나 그렇다고 부재한다고 할 수도 없기에 섬뜩하게만(unheimlich) 느껴지는 이 형상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오늘날 아직도 누군가 ‘공산주의’를 말한다면, 그 유령의 정체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미래에서 온 형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데리다가 앞으로도 출몰할 것이라 예견한) ‘마르크스의 유령’일 수 있다. 아니면 과거에서 온 형상인가? 이 경우 그것은 ‘르브낭’ 혹은 ‘좀비’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고 모두 배척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산은 데리다의 말대로 ‘주어진 것’(given)이 아니라 ‘맡겨진 것’(task). 마르크스의 유산 역시 ‘필요한 만큼 급진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다시 확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이념적 외설일 뿐이다.

데리다는 <햄릿>의 대사 두 군데를 인용한다. 하나는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한탄이다. 국역본을 보니 ‘time’을 ‘세상’이라 옮겼다. 관절이 어긋나듯이 세태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형수와 정을 통하는 세상. 햄릿은 한탄한다. ‘아, 저주받은 운명이구나. 내가 그것을 바로잡으려 태어났다니.’ 하지만 그 문장을 글자 그대로 옮길 수도 있을 거다. 이 경우 그 말은 시간이 뒤엎어지는 시간착오(anachronie)를 가리킬 것이다. 가령 과거에 속하는 선왕이 현재에 나타나는 것은 시간의 관절이 어긋난 현상이 아닌가.

또 다른 인용은 ‘To be, or not to be’라는 햄릿의 고뇌다. 굳이 ‘사느냐, 죽느냐’라는 번역의 올바름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데리다는 이 문장을 무엇보다도 ‘존재해야 할 것이 존재해야 하느냐’, 혹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느냐’라는 뜻으로 읽는다. 세태는 어긋났다(out of joint). 나는 그것을 바로잡으려 태어난 운명.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그 일을 저지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존재해야 할 그것’, ‘일어나야 할 그것’, ‘해야 할 그 일’이 아직 현존하지(present) 않는다는 사실이다.

<햄릿>의 두 인용은 각각 ‘존재’와 ‘시간’에 관련되어 있고, 이 둘은 다시 하이데거의 유명한 저작(<존재와 시간>)을 연상시킨다. 하이데거의 것을 포함하여 기존의 존재론은 모두 현재, 현존,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이었다. 유령은 다르다. 그것은 부재하면서 존재하고, 죽었으면서 살아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나 ‘흔적’의 시각적 형상에 가깝다. 데리다의 의도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존재’를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유령’으로 바꿔놓는 것, 한마디로 존재론(ontologie)을 유령론(hantologie)로 대체하는 것이다.

엑소시스트 마르크스?

유령을 쫓아내려 한 것은 부르주아들만이 아니었다. 구유럽의 부르주아들이 열심히 공산주의 유령을 쫓아버리는 퇴마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마르크스 자신도 실은 유령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그의 눈에는 자본주의적 현실 자체가 유령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하긴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추구하고, 화폐가 노동의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해 생산이 행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야말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환영, 즉 유령이 아닌가.

물론 자본주의의 가상성에 대한 그의 과학적 비판을, 우익들의 반공주의 퇴마술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전히 존재론(ontologie)의 한계에 갇혀 있다. 데리다도 슬쩍 언급하듯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마르크스 시대와는 생산과 기술의 조건이 전혀 다르다. 가상이 실재를 대신하고(시뮬라크르), 복제와 원본의 구별이 흐려지고(유전공학),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것(텔레마틱)은 이미 물리법칙만큼이나 견고한 현실이다.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이미 ‘가상은 실재만큼 견고하고, 실재는 가상만큼 유령스럽다’.

‘시간’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시간은 관절이 어긋났다(out of joint) 클릭 한번에 과거는 현재로 나타난다. 컴퓨터그래픽은 미래를 현재로 가져온다. 현재 위에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유령이 배회한다. 이 기술적 조건의 효과는 대중문화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포스트모던’의 상징으로 통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의 현실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메탈과 펑크와 고딕의 미학이 뒤섞인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종종 ‘유령론’(hantologie)이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새 인터내셔널’이라는 데리다의 정치적 대안 역시 그의 철학적 기획 못지않게 급진적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란,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중 적어도 한 가지 요소에 공감하는 이들 사이의 동맹”, 즉 “위상도, 좌표도, 당도, 나라도, 민족공동체도, 시민권, 특정 계급에 함께 속하는 일도 없는 비시간적 연결이다”. 비록 정당이나 노동자 인터내셔널과 같은 제도적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만, 이 동맹은 국제법의 상태, 국가와 민족의 개념 등을 비판하는 일에 연대하면서 마르크스의 비판을 새로이 하고, 급진화할 것이다.

계급에 속하지도, 정당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는 이 동맹이 어떤 이들에게는 ‘유령’으로 보일지 모르겠다(가령 촛불 시민들을 바라보는 전통 좌파의 시각을 생각해보라. 흥미롭게도 우익들 역시 이 시각을 공유한다). 그 동맹은 부재하나, 동시에 현재한다. 실제로 그것은 유령스럽다(spectral). 데리다 역시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이 유령 앞에서 퇴마의식을 벌이려는 이에게는 햄릿의 말을 들려주는 게 어떨까? “이 귀신을 귀한 손님으로 취급해서 환영해주세. 이 사람아, 세상에는 우리의 철학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 허다하게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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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