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배우들의 옷깃을 여미는 동작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아릿한 추위. 영화 '만추'는 늦가을 쓸쓸한 정서를 한껏 품어 안고 있다.
영화는 두 남녀가 함께한 3일의 이야기다. '만추'의 대사처럼 "인생에서 즐거운 시간은 후딱 지나가기"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그 순간이 영원히 박제돼 기억의 정물(靜物)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애나(탕웨이.湯唯)에게 훈(현빈)은 그런 존재고, 영화도 그 둘이 나누는 쓸쓸한 사랑이야기다.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과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하던 애나는 어느 날 끔찍한 폭행을 당하다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생활하던 어느 날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전해듣고 7년 만에 외출을 허락받는다.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 안. 무덤덤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애나에게 껄렁껄렁한 인상의 훈이 다가와 버스비가 부족하니 30달러를 빌려달라며 손목시계를 건넨다.
훈은 애나의 도움으로 버스를 타는 데 성공하고 시애틀까지 가면서 애나에게 '작업'(?)을 걸지만 그녀의 반응은 싸늘할 뿐이다.
시애틀에 와 헤어진 둘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 길거리에서 다시 만나고, 재산 다툼을 벌이는 형제 자매들에게 실망한 애나는 우발적으로 훈에게 함께 있자며 모텔로 향한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 이래로 '만추'는 남성 감독들에게 꾸준한 영감을 줬다. 김기영 감독은 1975년 '육체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김수용 감독이 '만추'(1981)라는 동명 타이틀로 영화를 재해석했다.
그때마다 내용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만추'의 중심추는 늘 여성 캐릭터였다. 이만희의 '만추'는 문정숙의 영화였고,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김지미의 영화였으며 김수용의 '만추'는 김혜자의 영화였다.
국내에서만 3번째 리메이크 된 김태용 감독의 '만추'도 이러한 전통을 따른다. 근작 '만추'는 탕웨이의 영화다. 탕웨이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차지하고, 카메라는 탕웨이의 동선을 담는데 치중한다.
쓸쓸함이 안개처럼 스미는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관객의 정서에 호소한다. 애잔한 기타소리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발을 맞는 애나와 훈, 그리고 애나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오프닝의 리듬감과 음악 없이 롱테이크(길게찍기)로 잡은 앤딩의 단아함은 은은한 듯 강렬하다.
우울한 정서를 한 번에 떨쳐버릴 듯한 환상적인 장면도 있다. 먼발치에서 사랑 다툼을 하는 두 남녀를 보면서 애나와 훈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것. 판타지처럼 두 남녀는 갑자기 춤을 추기도 하고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와는 맞지 않을 수 있으나 둘의 영글어가는 사랑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 만한 대목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이 각별하다. 탕웨이는 사연 많은 여인의 얼굴로 등장하는데 과장하지 않는 섬세한 연기로 영화의 격을 끌어올렸다. 현빈도 껄렁껄렁하면서도 잔정이 있는 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늦가을의 스산한 정취와 가슴 아리는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만추'는 분명히 장점이 많은 영화다. 하지만, 이야기의 잔재미나 볼거리가 풍부한 영화는 아니어서 일부 관객들은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추'는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2월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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