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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하사시에 대하여

엑스터시와 도취

어느 탤런트가 대마초 흡연 혐의를 받자 출연하던 드라마에서 하차하고 잠적해버렸다는 촌스러운 소식. 대마초를 ‘하시시’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풀’을 의미하는 아랍어라고 한다. 이 ‘풀’의 효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담배만큼도 안 해롭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그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마약엔 ‘치사량’이 있지만, 하시시는 치사량으로 알려진 수치가 없다는 것. 즉 하시시를 피운다고 생명에 지장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독일 경찰의 마약실태 보고에는 ‘하시시’라는 항목이 빠져 있단다. 이는 독일 정부에서 하시시를 마약과 구별하여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환각을 일으키는 풀

유럽에선 적게는 20%, 많게는 40%가량이 이미 청소년기에 하시시를 흡입하는 경험을 한다. 유학 시절 기숙사에선 학생들이 파티를 하면서 담배에 섞어 피우거나, 하시시를 넣은 케이크를 구워 먹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처럼 아예 길거리 카페에서 하시시를 판매하는 나라도 있다. 하시시를 ‘형법’이 아니라 ‘건강’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최근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시가 여전히 극도로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의 효과 때문일 거다. 즉 정신에 영향을 끼쳐 환각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하시시의 해악은 마약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리라.

한국 가요계의 전설들이 줄줄이 대마초로 잡혀 들어가던 70년대에, 한 일간신문에 경찰의 입회하에 대마초를 시연한 한 기자의 체험기가 실린 적이 있다. 기자가 묘사한 환각은 한편으론 무시무시하게 느껴졌지만, 거기에 또한 묘한 매력도 있었다. 대마초의 위험을 강조하는 홍보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그 안에 등장하는 대마초 흡연자들은 환각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모르겠다. 대마초를 공산당처럼 때려잡던 시절이니, 이 이미지 역시 뿔 달린 공산당만큼 어느 정도 왜곡, 혹은 과장되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체험기를 찾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무려 150년 전의 하시시 체험기가 올라온다. 지인이 동양에서 가져왔다는 이 신기한 약초(?)의 효과를 체험기의 저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콜레주드 광장으로 이어지는 집의 문을 열었더니, 건물들이 내게서 도망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가 아득히 먼 곳에 들려오는 듯했다. (…) 내 몸은 하늘로 떠올라 허공을 걷는 것처럼 느껴졌고, 거리와 상점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나보다 열등한 존재가 된 듯이, 발을 땅에 붙이고 살며 대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브리티시 메디컬 저널> 1862년 11월22일)

시적 명증성의 순간

하시시가 의학적 맥락에서만 흥미를 끈 것은 아니다. 발터 베냐민은 인문학적 동기에서 하시시 실험을 한 바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를 비롯한 당대의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했던 이 실험의 결과를, 베냐민은 프로토콜의 형식으로 꼼꼼히 기록해두기도 했다. 뒤에 이 글들은 다른 몇몇 글과 함께 <하시시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베냐민이 하시시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론적 동기가 있었다. 하나는 환각상태와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관계에 관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률과 모순율로 구축된 기존의 논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유체계의 탐색이다.

실험은 1927년에서 1934년에 걸쳐 행해졌고, 프로토콜은 모두 12차례에 걸쳐 작성됐다. 첫 번째 프로토콜에 나오는 구절이다. “1. 어깨 위에 환영이 나타난다(책 표지의 장식문양과 같은). 어깨가 차갑다. 방에는 네 사람이 있으나 내게서 동떨어진 느낌. 거기에 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8. 사람들의 미소에서 조그만 날개가 돋아나는 듯하다.” “9. 화로가 고양이가 된다. 책상을 정리하다 ‘생강’이라는 말을 듣자 과일가판대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이 책상이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천일야화가 떠오른다.” “24. 평소와 똑같은 사유의 길을 따라가나, 그 길에는 장미꽃이 피어 있다.”

프로토콜에는 공간이 확장되고 시간의 역행하는 착락, 눈앞에 추상적 문양을 보는 환각,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환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초현실주의적 체험에 가깝다.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하시시 체험의 다다이스트적 측면이다. 베냐민은 “정보에 대한 혐오”, 즉 일상의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게 귀찮아지는 체험을 기술하며, 그런 상태에서 오가는 대화에는 모종의 “시적 명증성”이 있다고 보고 한다. 가령 질문에 대답을 할 때,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에 들어 있는 “낱말들이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에 대한 지각”에 반응하게 된다는 것. “나는 이것을 시적 명증성이라 느낀다.”

철학의 엑스터시

이것이 하시시에 대한 미학적 관심의 표현이라면, 베냐민에게는 또 다른 호기심이 있었다. 즉 하시시 체험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에 기초한 기존의 형이상학을 전복할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베냐민이 거기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나중에 하시시에 관한 책을 쓸 생각이었으나, 이 계획은 끝내 성사되지 못한다. 나치를 피해 망명하려던 계획이 좌절된 순간, 이 유대인 비평가가 자신의 목숨을 끊는 데에 사용한 것은 다량의 아편이었다. 그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도 않았다면, 아편의 체험에 대해서도 상세한 프로토콜을 남기지 않았을까?

베냐민의 철학적 기획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철학을 ‘논리’가 아닌 ‘도취’로 바라본 사람은 있었다. 가령 <숭고에 관하여>의 저자 위(僞) 롱기누스를 생각해 보라. “숭고는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여기서 도취는 논리보다 더 높은 곳에 선다. 니체 역시 틈만 나면 ‘환각’(Rausch)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인간들은 디오니소스적 사태에서 자기 삶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에게 환각이란 “형식의 빛나는 승리”이며, 미학적 충동의 중추적 기능이다. 가장 최근에는 프랑스 철학에서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들(특히 들뢰즈)의 글에는 모종의 환각이 있다.

하이데거는 이와는 좀 다른, 물론 재미없는 맥락에서 철학의 ‘엑스터시’를 얘기한다. 그는 근대의 유아론적 ‘주체’의 관념을 해체하는 데에 이 개념을 동원한다. ‘엑스터시’란 ‘바깥에(ek) 선다(stare)’는 뜻이다. 하이데거에게 “유한한 주체들이 자신의 바깥으로 나와 무한한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인간, 즉 현존재(Dasein)를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세계 내에 다른 이들과 공동으로 들어 사는 존재로 본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철학에서 엑스터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엑스터시는 일상적 의미의 ‘엑스터시’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예술가나 연예인이 하시시에 탐닉하는 것은, 아마도 환각상태가 ‘지각’을 예민하게 하고, 사유를 비상하게 만들기 때문일 거다. 하시시 체험자의 대부분은 시청각적 자극에 오감이 극도로 민감해진다고 말한다. 베냐민은 하시시에 도취된 상태에서 “(에드거 앨런) 포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보고했다. 말하자면 하시시를 통해 창작에 요구되는 능력을 비상하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얘기. 더이상 하시시 흡연을 범죄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예술가라면 일상적 트랑스의 능력, 즉 맨 정신을 가지고 하시시를 피운 상태로 넘어갈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성기를 만지지 않고 명상만으로 사정을 하는 고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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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