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3년째 이 지면을 통해 신년인사를 하는 팔자가 되었습니다. ‘독자들이 식상할 것’이라는 판단에 “고사 어쩌구…”라고 적은 메일을 신임 편집장에게 보냈지만, “니까지 그라믄 내 돌아삔다”는 답장이 왔다는 사정을 전하면서, 신년 기분에 어울리는 참신한 글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 심심한 양해를 구합니다. 편집장의 판단이 옳았는가 아닌가는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죠. 차제에 이번에는 국수전골은 고사하고 돌솥밥도 얻어먹지 못했고, ‘원고료 인상’ 같은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는 사실도 밝혀둡니다.
아무래도 신년 첫 글은 소재의 제약이 많습니다. 별다른 재주 없으니 생각의 시점이나 바꿔서 ‘1년 뒤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헉, 한국인들의 삶의 환경을 전반적으로 규정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겠군요. 말을 꼬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대통령이 바뀐 다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우리의 심정은 어떨까요? ‘정권을 되찾았다’고 희희낙락할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벌써부터 예단하지는 말자고 단도리해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대통령선거는 12월에 치러지니, 정치판 소식은 1년 내내 각종 스트레스를 안겨줄 듯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일이 이처럼 초강성 스트레스를 안겨준다니, 한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쳤던 일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지금 있는 정당구조 그대로 선거가 치러지리라는 최소한의 기대를 품어보지만, 아무래도 너무 순박한 생각인 듯합니다. 전당대회, 경선불복, 분당강행, 신당창당, 자질시비, 선거판 혼탁, 부정투표, 돈봉투 등의 단어는 잠깐만 떠올려도 극도의 짜증이 몰려옵니다. 선거 개표방송 때 한 지역은 새파랗게, 다른 지역은 시뻘겋게 될 한반도 지도를 떠올리면 절망을 넘어 비애가 몰려옵니다.
6개월 뒤를 떠올려볼까요. 6월에는 월드컵 축구대회라는 ‘국가적 대행사’가 개최된다고 합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지만, 축구 혐오자인 저로서는 악몽 같은 한달일 것입니다. 축구혐오증은 어떤 프랑스 사상가처럼 ‘축구가 다른 스포츠보다 과정보다 목적(goal!)을 유난히 중시한다’는 철학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 축구와 연관된 괴상한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국내 경기 때는 텅텅 비다가도 국가대표 경기 때만 가득 차는 관중석을 보고 있으면, ‘축구를 좋아하다보니 애국심이 생기는 게 아니라 애국하기 위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대회가 끝나면 일본에 비해 형편없이 저조한 성적과 시원치 않은 관광수입을 두고 티격태격할 것이 뻔합니다. ‘일본에만은 질 수 없다’는 국민성의 소유자들이 어떤 해소책을 찾아나설지 궁금하군요.
그나저나 경제는 어떨까요?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하니 상승곡선을 그리는 게 경제학의 법칙이련만 어떻게 된 일인지 현실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은 “경기가 회복되어도 서민의 경기는 나아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상반기 경제성장 호조’ 같은 뉴스를 보더라도 내 지갑과 통장이 가득 차기를 기대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경제학자들이 ‘L자형’이니 ‘V자형’이니 ‘U자형’이니 하면서 경기회복의 유형을 설명하는 복잡한 이야기들에 현혹되지 말고, ‘아르헨티나 꼴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는 말입니다. PC통신, 삐삐, 휴대폰, 인터넷, 디지캠, mp3 플레이어, PDA 그리고 새로 나올 장난감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사는 것만 해도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1년 전에 쓴 글을 보니 제목이 ‘신년 무계획 2001’이더군요. 지금 다시 보니 ‘계획이 지켜지지도 않을 바에는 차라리 계획없는 삶을 살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더군요. 그게 직설법인지 반어법인지는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는 평소의 소신을 밝혀봅니다. 단지 새해에는 각 시기별로 신경 꺼두어야 좋을 사안들이 지뢰처럼 잠복해 있으니 미리 확인하는 계획은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2002년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무관심, 냉담, 개김, 불개입, 무실천, 보이콧, 사보타주 등이 가장 유효한 정치적 전략이다’라는 신념이 타당한지를 검증하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정치적으로 ‘아무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이 깨어 있으면서도 제도권 정치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게 지내자는 제안입니다. 모쪼록 희망 가득 찬, 혹은 덜 절망적인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꾸벅.
신현준 I 문화비평가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