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살인적인 스케줄', '링거 투혼', '잠과의 전쟁', '불굴의 의지'….
수험생, 고시생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이러한 표현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분야가 있다. 바로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이다. 몇몇 연속극이나 극소수의 사전제작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드라마 현장이 예외가 아니다.
이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드라마 이면에 연기자와 스태프의 보이지 않는 땀과 열정이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드라마 현장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은 사고 위험을 안은 채 후진적으로 돌아간다는 증거일 뿐이다.
특히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예외 없이 '생방송'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매회 방송이 되는 날까지 찍어서 겨우겨우 제시간에 드라마를 내보내기 때문에 생방송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그 때문에 연기자나 제작진이나 드라마 종영 후 "시간이 좀더 있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걸"하며 왕왕 아쉬워한다. 그러한 아쉬움이 고스란히 드라마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원 "잠 쫓으려 집중력 키우는 약도 먹어" = 화제 속에 종영한 SBS '시크릿 가든' 역시 제작진에게는 잠과의 전쟁이었다.
하지원은 지난 20일 인터뷰에서 "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중간에는 너무 잠을 못 자 정신이 해롱해롱하고 눈도 못 뜨는 지경에 이르러 집중력이 너무 떨어졌다.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 처방을 받아 집중력을 키우는 약도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늘 조금만 더 자고 하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잠이 부족했다. 시간을 더 주고 다시 하라고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작년 신드롬을 일으켰던 KBS '성균관 스캔들'의 배우들도 촬영 내내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다.
당시 박유천은 "병원에 두 번 실려갔다 오면서 배우들이 정말 힘들게 일하는구나 느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먹기보다 잠을 자야했고, 연기에 대한 부담감에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도 없어 안 먹게 되니 10㎏이 빠졌다"고 말했고, 박민영은 "카메라 앞에 서서 졸 정도로 스케줄이 너무 힘들었고, 24시간 중 23시간을 메이크업해 있고 3일 연속 잠을 못자 다크서클이 볼 아래로까지 내려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폭발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성균관 스캔들'이지만 이렇듯 살인적인 스케줄 탓에 후반으로 갈수록 세밀도가 크게 떨어지면서 허술함이 많이 노출됐다.
◇박신양 "언제 누가 먼저 쓰러지나 내기하는 것 같다" = 박신양은 최근 SBS '싸인'의 일본 촬영 도중 종아리 근육이 경직되는 부상으로 현재 목발 신세를 지고 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지난 1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많이 아프다. 걷지 못하겠다. 밤 너무 많이 샌다. 언제 누가 먼저 쓰러지나 내기하는 것 같다"고 밝히며 부상 뒤에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어 19일에는 "'드라마를 시작하면 잠을 지새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라는 제작사의 코멘트는 의문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인가? 불면불휴(不眠不休)로는 배우도 스태프도 매우 지쳐버린다. 이것이 당연했던 채로 좋니?"라는 글을 올리며 현재의 한국 드라마 촬영 환경에 문제제기를 했다.
SBS '아테나: 전쟁의 여신'에 출연 중인 정우성도 최근 간담회에서 "한국 드라마가 잘 나가는 현재 그 이면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해봐야 한다. 배우들이 피곤에 쌓여 연기하는 게 TV 화면에 보일 정도"라며 답답해했다.
◇사전제작.제작편수 축소가 대안?.."한국은 특수한 환경" = 작년 3월 인기리에 막을 내린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이순재는 "보면 재미있지만, 작업 과정은 지옥이다. 생사를 걸고 한 작품"이라며 시트콤에 국한하긴 했지만 한국 드라마도 외국처럼 완전한 사전제작이 이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붕뚫고 하이킥'을 끝내면서 "지금의 제작 조건으로는 힘든 작품이다. 적어도 1년 전에는 사전제작을 해야 좋은 컨디션에서 할 수 있다"며 "좋은 조건이 갖춰줘야 가능하지 안 그러면 사고난다. 이제는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고현정은 드라마 편수를 줄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달 SBS '대물'을 끝내면서 "정말이지 한국 드라마는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며 "모든 드라마를 일주일에 한 회씩만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저 역시 익숙해진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지상파 TV에서 일주일에 130여분씩(두 회) 방송하는 드라마가 10여 편이다 보니 여러가지로 힘든 점이 많은 것 같다"며 "드라마 편수를 좀 줄이고 그 대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대해 대부분의 드라마 관계자들은 한국적 특수한 환경을 거론하며 그 실현 가능성을 높이 보지 않는다. '드라마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 현실은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의 열혈 시청자들은 드라마 내용에 실시간으로 '참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전제작을 하거나 드라마 편수를 줄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드라마 작가들이 실시간으로 시청자의 의견을 확인하며 드라마 줄거리에 반영하고 있고, 방송사 역시 드라마가 시청자와 실시간으로 호흡하며 화제를 만들어내길 원한다.
이로 인해 사전제작을 해도 방송사 편성을 따내기가 힘든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간혹 사전제작 드라마가 선보여도 제작시점과 방송시점 간 시차가 큰 까닭에 '올드'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는 등 사전제작은 여전히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탓에 화제는 될지언정 시간에 쫓겨 후반으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들이 여전히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자들은 반(半) 사전제작을 목표로 방영 전 되도록 많은 분량을 찍어 시간적 여유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이상적 제작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완전 사전제작을 하기에는 편성은 물론, 협찬 등 제작비 조달에서도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절반이나 최소한 3분의 1정도는 방영 전 찍어놓은 후 시청자와 호흡하며 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23일 "방송 전 미리 많이 찍어놓으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그러나 급변하는 한국 드라마 환경에서 그럴 시간이 사실 별로 없다"면서도 "그럼에도 한국 드라마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제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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